[윤석원의 농사일기 73] 사과꽃

  • 입력 2019.05.12 18:00
  • 기자명 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봄이 되면 온갖 꽃들이 자태를 뽐내기 시작한다. 우리 집 작은 농장에도 온갖 들꽃은 물론이고 복수초, 민들레, 제비꽃 등이 봄만 되면 앞 다퉈 자태를 드러낸다. 조금 지나면 매실꽃, 배꽃, 복숭아꽃 등이 피기 시작하고 뒤이어 사과꽃도 피기 시작한다.

사실 나는 사과꽃을 본적이 없거나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 어떻게 생겼는지 또 색깔은 어떤지 등 기본적인 생김새도 전혀 몰랐다. 매실꽃이나 배꽃, 복숭아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고 책이나 화폭에도 자주 등장하여 비교적 익숙했다. 그러나 사과꽃은 문학작품이나 미술작품에서 접해 보질 못했다.

그런 내가 사과 농사를 짓고 있으니 사과꽃은 물론 사과잎과 사과나무의 생김새 등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사과꽃은 정말 매력적임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이곳 양양지역에서는 4월 중순부터 꽃이 피기시작하면 대략 2주 후에 만개하고 5월초에 지게 된다. 지난해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던 꽃눈이 겨울을 지나 4월이 되면 꽃눈에서 파랗고 엷은 녹색의 싹들이 움트기 시작하고 1~2주 정도 지나면 그 속에서 연분홍 꽃망울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나도 꽃눈에서는 당연히 꽃이 먼저 터져나오는 줄 알았는데 4년차가 돼서야 겨우 꽃눈에서 꽃망울보다 작은 이파리가 먼저 움트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얼마나 관찰력이 부족한지 모르겠다.

암튼 이파리 속에서 피어오르는 분홍색 꽃망울은 정말 환상적이다. 겨우내 거무스레하던 과수원은 초록의 이파리 속에서 고개를 내미는 분홍색 꽃망울들로 절제된 채색의 미가 압권인 수묵담채화처럼 아름답다.

일주일쯤 지나면 분홍색 꽃망울이 터지면서 사과꽃은 흰색으로 활짝 펴진다. 이럴 때면 사과밭 전체는 순백의 동산으로 출렁인다. 4년이 지나서야 꽃피는 과수원의 아름다움을 절실히 느꼈다. 하기야 3년차인 지난해에는 꽃도 많지 않았을 테고 그 꽃을 감상할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제 4년차가 돼서야 꽃도 많이 폈고 과수원 전체의 장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사과꽃이 가슴 깊은 곳에 여운을 남기는 것은 화려한 자태와 자극적인 향기가 아니라 그 향의 은은함과 꽃 모양의 소박함에서 느껴지는 편안함과 진정성이 나를 더욱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화려한 아름다움과 성공과 행복을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남보다 더 잘 살아야 되고 더 높은 권력과 명예를 얻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소박한 삶을 추구하면서도 은은한 향과 진정성 있는 인간이기를 소망하는 삶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사과꽃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있다. 인생 후반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