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17] 두 남자의 길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 입력 2019.05.05 18:02
  • 수정 2019.05.17 14:05
  • 기자명 한국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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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을사늑약 체결 이후 나라를 팔아먹은 대신들을 없애고자 ‘오적암살단’을 조직한 사람이 있었다. 단도와 총, 폭약 등을 준비하고 여러 차례 시도를 했지만 거사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 우리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니, 대종교 초대 교주인 홍암 나철이 바로 그다. 나철은 본래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관료였으나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호남 출신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시작하였다. 네 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가 궁성 앞에서 단식을 하는 등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무위로 돌아가고 암살단 조직으로 십년의 유배형을 받기도 한다.

그러던 중 민속 신앙 비슷하게 전승되어 오던 단군을 중심에 놓는 민족 종교인 단군교를 창시하게 된다. 흔히 ‘고삿날’이라고 불리던 10월 3일을 개천절이라고 이름 붙인 사람도 나철이다. 개창 일 년 만에 대종교라고 이름을 바꾸는데 그가 부흥시킨 대종교는 항일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국조인 단군을 모시는 종교의 출현은 독립에 대한 강렬한 이념적 지표가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나철을 종교적, 이념적 지도자로 인정했으며 임시정부의 초대 의정원 29명 중에 무려 21명이 대종교 신자였다. 대표적인 인물들을 꼽자면 신채호, 홍범도, 이동휘, 이범석, 정인보, 주시경, 홍명희, 김구 등과 영화감독 나운규도 대종교 신자였다. 김구와 조소앙, 이시영 역시 신자였다.

대종교 지도자 홍암 나철.
대종교 지도자 홍암 나철.

또한 만주에서 독립전쟁에 참여한 사람들 중 3분의 2가 대종교 신자였으며 저 유명한 청산리 전투의 총사령이었던 서일은 대종교의 핵심인물이었다. 홍암 나철은 대종교를 독립운동을 위한 전진기지로 생각했고 실제로 만주에 있던 36개의 대종교 포교당은 말 그대로 독립운동가 양성소였다. 일제 치하에서 대종교의 영향력은 막강했고 이를 큰 위협으로 여긴 일제는 1915년에 대종교를 불법화하였다. 이에 나철은 교주로서 최후의 선택을 하는데 다름 아닌 자결이었다.

몇몇 동지들과 단군의 유적이 있는 구월산으로 들어간 나철은 제자들에게 독립투쟁에 헌신할 것을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1916년 가을, 폐기법으로 목숨을 끊었다. 스스로 호흡을 정지하는 폐기법은 선가에서 내려오는 방식이었다. 나철의 죽음 이후 대종교는 본거지를 만주로 옮기고 맹렬한 독립투쟁에 돌입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일 년 전에 이미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고 무려 10만에 이르는 신자들이 독립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교세가 약화되고 해방 후 대종교는 친일파들에 의해 철저히 외면 받았지만 홍암 나철에 대한 조명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선 마지막 왕 순종 이척.
조선 마지막 왕 순종 이척.

한편, 나철이 자결한 이듬해 한 남자가 60여 명의 시종을 거느리고 현해탄을 건넌다. 마흔 네 살 중년의 이름은 이척,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었다. 그의 일본행은 우리 민족사 중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지만 거의 거론이 되지 않는다. 아마 너무도 수치스러워서일 것이다. 이척의 방일은 일제가 치밀하게 계획한 것이었다. 조선의 직전 왕이 일왕을 배알하여 신하의 예를 표하는 것으로 완전무결하게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임을 공표하려는 의도였다. 실제로 이척은 일왕 대정을 만나 주군을 배알하는 의식인 ‘천기봉사’를 치른다. 일왕에게 허리를 굽혀 절하고 명치 일왕의 능에도 참배하는 등 저 삼전도의 굴욕에 못지않은 치욕을 당한다. 혹자는 이척을 친일인명사전 첫 머리에 올라갈 인물이라고 한탄하기도 하는데 고종과 순종을 비롯한 왕족들은 그 사전에 이름이 없다. 어쩌면 우리 안에 남아있는 봉건 의식이 한때 왕으로 모셨던 이들만은 제외시키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나철과 이척, 쉰 세 살의 삶을 살다간 두 사람의 길은 우리 근대사가 걸어갈 상징적인 두 갈래였다. 그리고 그 역사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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