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해방공간 한 선교사의 ‘영천 일기’①

  • 입력 2019.05.05 18:00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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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루이 델랑드, 그리고 영천. 델랑드는 프랑스 파리 외전방교회에서 파견한 선교사로 영천성당 신부였다. 1923년 프랑스에서 조선으로 건너와 1934년에 영천군 화산면 용평본당에 도착한 뒤, 15년 동안 영천을 살아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런 이력만으로는 ‘루이 델랑드’와 ‘영천’을 연결하는 문장은 완성될 수 없다. 1946년 10월, 영천에는 루이 델랑드가 있었고, 그가 ‘영천 10월 항쟁’에 대한 일기를 남겼다고 해야 마침내 문장이 완성된다.

내가 굳이 이 자리에서 루이 델랑드를 호명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앞에서 밝혔다시피 그는 1946년 영천 10월 항쟁 당시 상황을 일기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그의 일기는 몇몇 신문기사를 제외하고는 항쟁 당시를 지켜본 유일한 현장 기록이며 그 일기가 「루이 델랑드 신부의 선교 노트」(이하 「선교 노트」로 표기한다)라는 책으로 묶여졌다. 나는 그의 해방공간 ‘영천 일기’를 지난 해 가을 어느 새벽에 읽었다. 「선교 노트 1」의 해방공간 일기를 따라가면서 나는 간간히 흥분으로 몸을 떨기도 했지만, 그러나 더 많이는 아쉬움 때문에 자주 긴 탄식을 토해내곤 했다. 솔직히 말해 읽는 내내 마음 한쪽이 불편했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시집「시월」,「영천아리랑」,「어처구니는 나무로 만든다」를 통해 영천 10월 항쟁을 웅변했던 내가 그 일기를 만났을 때의 반가움이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선교 노트」는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없는 ‘비매품’이다. 굳이 보태어 속되게 표현한다면 팔아먹기 위해 시장에 내놓은 ‘상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오래 망설였다. 천주교인이 아닌 내가 비매품 「선교 노트」를 두고 함부로 왈가왈부하는 건 불가침영역일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수많은 천주교인들에게 루이 델랑드는 ‘받듦’의 존재이기에 감히 논평의 대상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일기는 쓴 사람의 은밀한 속살을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조심스럽지만, 그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대상황을 담고 있다면 개인의 문제를 뛰어넘는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영천에 살면서 ‘영천 10월 항쟁’을 연구한 내가 루이 델랑드를 세상에 호출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10월 항쟁은 친일파 청산 실패와 미군정의 정책 실패에 대한 당연한 저항이었으나 우익에 의해 암매장당한 우리 역사였고, 지금 우리 사회 일각에서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1946년 ‘10월’을 살아냈던 당시 영천사람들은 그에 대한 기록은 고사하고 명확한 증언 한마디도 남겨놓지 않았다. 바람결에 들은 것 같은 전언들은 ‘반공’쪽으로 굴절되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 만난 「선교 노트」는 당시 영천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하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상당하다. 특히 일본과 만주에서 돌아온 수많은 귀환동포와 북에서 내려온 월남자들이 유입되면서 빈민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던 영천에서, 그로 인해 발생한 부랑자와 고아들을 델랑드는 해방공간 일기 전편에서 끊임없이 호출하고 있지 않는가. 프랑스 지인들로부터 의약품을 지원받아 1930년대에 이미 용평본당에서 무료진료소를 열었고, 양로원과 보육원을 운영했던 그는 빈민구제를 위한 일이라면 영천군청과 미군정을 상대로 대단히 전투적이었다. 간혹 좌익 쪽의 정보를 미군 장교에게 흘리기도 했던(1945년 10월 14일 일기) 그의 공간은 마치 영천주둔사령관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북적거렸다. 다섯 달이나 진행된 재판에서 미군정 재판관들이 그의 집을 숙소로 이용했으며, 수많은 미군정 장교들과 영천군수며 경찰서장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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