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우표⑥ 각하의 얼굴을 두들겨 패?

  • 입력 2019.05.05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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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1962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세력이, 이른바 ‘5.16 혁명’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혁명 1주년 기념우표’를 만들도록 체신당국에 지시했다. 군사정부에서 지시한 사항인 지라, 우표발행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고 어쩌고 할 계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기념우표는 발행되었고, ‘혁명정부’를 해외에 알리기 위해서 영문판으로도 제작했으며, 수집가들을 위해서 따로 소형 기념시트(souvenir sheet)를 만들어서 공급을 했다. 그 얼마 뒤에는 한 술 더 떠서, 광화문 전화국에서 ‘국제우편전시회’라는 행사까지 개최했다. 그 때 김동권은 체신부 우정국의 국내 우편과장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전시장이 온통 별들로 가득 찼어요. 이른바 ‘혁명정부’를 홍보하기 위한 잔치인지라, 주체세력에게 잘 보이려고 모여든 것이겠지요. 그런데 체신부의 우표계장이 전시장으로 달려와서는 큰일 났다는 거예요. 그 소형 시트 영문판에 글자 하나가 빠졌다고….”

확인해 보니 우표를 나타내는 포스티지 스탬프의 postage에서 끝 글자 e가 누락되는 바람에 ‘포스타그(postag)’라는 사전에도 없는 단어가 돼버린 것이다. 전국 우체국에 배포했던 해당 우표시트를 서둘러 회수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바로 사표를 써서 제출했는데…요상하게도 안 자르더라고요. 문책을 안 받고 넘어갔어요.”

우표수집 전문가인 김갑식 씨에 따르면, 정치 후진국일수록 국가 원수의 사진이 우표에 자주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와 전두환이 우표에 가장 많이 얼굴을 내밀었다. 단독 모델로 출연하기도 했지만 외국정상이 한국에 오는 경우 방문 기념우표를 만드는 것이 당연한 의례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에는 유엔에서 남과 북의 정부가 치열한 표 대결을 하던 때였으므로 아무리 오지에 위치한 소국이라도 유엔 회원국이라면, 그 나라의 정상을 불러들여서 한바탕 후한 대접을 하고, 그 기념으로 우표까지 발행하였다.

“그런 우표는 도안이고 뭣이고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그냥 두 사람 얼굴 나란히 배치해서 찍어내면 되니까, 심의회의를 열어서 대통령 얼굴이 왜 이렇게 생겼냐, 좋은 놈으로 바꾸자, 이럴 수는 없잖아요. 제가 일일이 집계를 해봤는데요, 우표에 얼굴이 등장한 횟수로 치면 집권 18년의 박정희보다 전두환이 더 많아요. 무려 48종의 우표에 얼굴을 내밀었으니까요. 우표 수집하는 사람들은 우체국에 갔다가 그 얼굴 나오는 우표 내놓으면 찢어버렸어요. 그런 안 좋은 소문이 퍼지자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는 취임기념우표만 발행하는 것으로 정착이 됐지요.”

1985년 6월, 체신부 우정국에 비상이 걸렸다. 그 달 25일에 서부 아프리카의 기니비사우 대통령의 방한이 예정돼 있었는데, 방문 일자가 촉박했음에도 아직 그 나라 대통령의 사진을 구하지 못 한 때문이었다.

-기니비사우라는 나라가 있기는 한 거야? 누가 백과사전 좀 찾아봐!

-아프리카 서부에 있어. 포르투갈 말을 쓰고 수도는 비사우….“

-이번에 올 그 나라 정상의 이름이 뭐라더라, 비에이라 대통령?

-그런데 외무부에서도 사진을 아직 못 구했다는데 어떡하지?

하는 수 없이 기니비사우라는 나라의 비에이라 대통령 방한 기념우표는 두 나라의 국기를 교차한 그림을 도안으로 삼아 발행하였다. 대통령 얼굴이 박힌 우표는 우체국 직원들한테도 환영받지 못 했다.

어느 날 우체국 직원이 편지봉투의 우표 위에다 열나게 고무도장(일부인)을 찍고 있었는데, 마침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저기 그 곳’의 기관원이 우체국에 들렀다가 그 장면을 목격 했겠다?

“너 이놈! 감히 각하의 존영을 고무도장으로 마구 두들겨 패? 넌 죽었다.”

그래서 잡혀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그 시절 박정희의 사진을 존영(尊影)이라고 받들고, 그 얼굴 사진을 함부로 다루지 말아야 한다고 캠페인을 벌이던 단체가 있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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