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16] 친일의 민낯
[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16] 친일의 민낯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9.04.21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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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제16회>

어느 식민지를 막론하고 식민지배자는 그들에게 우호적인 피지배자를 만든다. 우리나라 역시 을사늑약 이래 많은 친일파들이 출몰하였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친일문제는 어떤 맥락과 뿌리를 가지고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초기에 형성된 친일파들을 살펴보는 것은 근현대사 이해에 필수적이다.

친일파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형성되었고 일제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친일파를 만들어나갔다. 우선 아직 민인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봉건왕조에 대해서는 돈과 향락을 무기로 무력화, 혹은 친일화했다. 조선 왕실을 보호하겠다는 내용을 병탄조약에 집어넣었으나 그들이 말하는 보호는 일종의 유폐생활이었다. 왕가를 관리하는 이왕직이라는 관서를 만들고 매년 150만 엔을 예산으로 책정하여 쓰도록 했다. 당시 헌병보조원의 월급이 16원이었으니까 액수 자체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그 돈으로 고종과 순종, 그들이 거느린 비빈들은 잃어버린 나라의 궁궐에서 사치를 누리며 살았다. 이를 두고 윤치호는 ‘동양 역사에서 몰락한 왕조가 이토록 존엄한 대우를 받았던 예는 찾아볼 수 없다’라며 일제의 정책을 칭송했다. 결코 왕이 될 수 없는 순종의 자식들에게도 영친왕이니, 의친왕이니 하는 호칭을 주고 일본이 들여온 유럽식 귀족제도인 공작 대우를 했다. 그들은 모두 불행한 삶을 살았고 이왕가는 흔적 없이 사라져갔다.

또 다른 친일파 양성 경로는 구 관료들이었다. 일제는 한일병탄을 발표하며 ‘조선귀족령’이라는 해괴한 법령도 함께 공표하는데, 이에 따라 그들에게 협력하고 호의적인 이들에게 조선의 귀족이라며 다섯 가지 등급 즉 공·후·백·자·남으로 나누어 작위를 수여했다. 이 작위를 받은 자들이 76명이었는데 일부는 일제에 반발해 작위를 반납하거나 나중에 3.1운동에 참여해 박탈당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일제가 준 귀족 칭호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았다. 훈장을 마치 예전에 왕이 내려준 교지처럼 가보로 삼았고 나들이 할 때는 정장 위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곤 했다.

병탄조약 직후 기념사진을 찍는 친일파와 총독부 관리들(왼쪽)과 훈장을 달고 있는 이완용.

이완용 같은 자는 애초에 백작을 받았다가 친일의 공로가 점점 더해져 후작으로 승진되기까지 했다. 백작이라는 말이 불어로 ‘콩테’인데 이완용이 자랑스럽게 스스로를 콩테라고 부르면서 지금도 널리 쓰이는 ‘꼰대’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꼰대라는 말은 스스로 못된 짓을 하고도 거들먹거린다는 의미라 하겠다.

일제가 친일파를 양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돈이었다. 이들은 소위 은사금(恩賜金)이라는 명목으로 친일파들에게 나누어 줄 돈을 마련하는데 이를 위해 국채 3,000만 엔을 발행하였다. 즉 친일파들에게 간 돈은 고스란히 민인들의 고혈이었다. 은사금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왕자인 의친왕으로 83만 엔이었고 민간인으로는 이완용이 15만 엔으로 1위였다. 을사오적과 정미칠적이 10만 엔, 자작과 남작은 각각 5만과 3만 엔을 받았다. 평생 먹고 살기에 충분한 재산을 받은 것은 물론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에 협력한 대가였다.

개중에는 재산을 탕진하고 빚쟁이로 전락한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지금까지도 부를 이어오고 있다. 가장 악질적인 친일파였던 송병준의 아들은 아버지 못지않은 친일활동으로 작위를 세습했고 이완용의 아들 이병길 역시 재산을 잘 관리하여 엄청난 규모의 대지주로 군림했다. 이완용의 후손들은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최근까지 소송을 진행하였고 민영휘는 휘문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투자했는데 오늘날의 휘문법인이 그것이다. 귀족 칭호와 돈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옛 고관들에게는 중추원에 자리가 주어졌다. 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은 마치 조선인에게도 정치 참여의 길이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말 그대로 허울뿐인 직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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