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유기농 청년농부의 솔직당당 독립기

이 사람 ㅣ 전남 보성 청년농민 강선아 대표

  • 입력 2019.04.21 18:00
  • 수정 2019.04.25 10:47
  • 기자명 심증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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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유기농 1세대인 아버지 뒤를 이어 농업회사법인 대표를 맡은 강선아씨는
유기농 1세대인 아버지 뒤를 이어 농업회사법인 대표를 맡은 강선아씨는 "청년농민 육성을 위한 거창한 정책 대신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저는 모태유기농 농부예요. 부모님께서 결혼서약으로 죽을 때까지 유기농사를 짓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정농회 회원이셨는데 회원들 앞에서 결혼식을 하면서 그렇게 했다고 해요.”

강선아씨는 우리나라 유기농의 1세대이고 최초로 쌀 유기농인증을 받은 전남 보성농민 강대인씨의 딸이다. 강대인 선생은 우리나라 유기농업의 역사를 써온 분으로, 유기농 선구자이며 일반 사람들에게는 낯선 생명역동농업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매일 논밭에서 일하던 부모님

그러나 유년시절 그녀에게 아버지 어머니는 매일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일 뿐이었다. 매일 밭에서 풀을 매는 것이 일이었다. 어린애를 논두렁 밭두렁에 데려다 놓고 일을 했다. “어느 날 엄마가 저를 논두렁에 데려다 놓고 한참 일을 하다 보니까 애가 없어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찾아보니 도랑에 떠내려가고 있었대요.” 가슴이 덜컥하는 아찔한 일이지만 농촌에서 애를 키우는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기도 한다.

특히 애를 돌봐줄 사람이 없는 젊은 부부들은 아이를 데리고 들에 나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부모님 역시 그랬다. “동생들도 고생을 많이 했어요. 새벽별 보고 나가시면 저녁별 보고 들어 오셨으니까요. 제가 동생들하고 집 지키면서 컸어요.”

농사짓는 부모님 밑에서 크면서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던 강씨는 학교에 들어가면서 부모님이 짓는 농사에 대해 달리 생각하게 됐다. “지각하는 날은 아빠가 논에 다녀온 작업복 차림으로 자전거로 학교에 데려다 주셨어요. 그런데 친구 아빠들은 출근 복장으로 데려다 주고, 친구네 집에 가면 친구엄마는 간식 챙겨주고 숙제도 봐주시고 하는 것을 보면서 엄마 아빠가 농사짓는 게 좋지 않았어요.”

사회적 분위기 역시 농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부모님은 왜 농사를 짓는지 또는 농사가 왜 중요한지 설명해 준 일도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집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집에 유명한 사람들이 찾아오더라고요. 북적북적 대는 일이 많았어요. 왜 벌교 우리집에 이런 사람이 찾아오지? 갸우뚱 했죠.” 부모님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녀는 ‘아빠 엄마가 뭔가 좋은 일을 하는가 보다’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갖게 됐다.

그녀가 농업에 대해 계획을 세운 것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다. “대학 다니면서 서울에서 농산물 사업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부모님께서 유기농 쌀과 농산물 가공식품을 생산하고 있으니 서울에서 사업을 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 출발점인 셈이다.

그러나 부모님 생각은 좀 달랐다. “부모님은 생명역동농업을 하시는데 그 시작이 독일이에요. 생명역동농업과 연관이 있는 발도로프 교육을 배우면 어떻겠냐고 독일 유학을 권하셨어요.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면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죠.” 대학 졸업, 유학, 부모님 농장과 연계한 교육사업 등을 하나씩 구상하게 됐다. 그런데 대학 졸업 즈음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아버지는 겨울마다 40~50일씩 산에 들어가 단식기도를 하셨어요. 그 해에도 단식기도를 했는데 이후 몸 관리를 소홀히 하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집에 내려와 농사를 돕게 됐어요.” 농사일을 잠시 도우려던 그녀가 ‘청년농부’로 자리 잡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또 아버지를 이해하는 시간이 됐다.

고향에 있으면서 강씨는 어머니 제안으로 한국벤처농업대학 교육에 참여했다. “교육을 받다가 우연히 아버지 강의를 듣게 됐어요. 할아버지가 제초제 때문에 암으로 돌아가시게 된 것을 알고 유기농을 시작한 사연, 돈이 안 되더라도 유기농을 실천해야 한다는 신념부터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모터를 키러 다니는 길 쪽 벼가 더 잘 자라더라는 경험담까지. 아버지는 논에 가면 ‘사랑하는 벼들아 잘 잤냐’하고 큰소리로 외치셨거든요. 그럴 때마다 저는 부끄러워했어요. 조용히 하시라고, 사람들 본다고. 그제야 아버지가 왜 그랬었는지 퍼즐을 맞추듯 알게 됐어요. 아버지의 신념과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됐습니다.”

매일 보던 아버지였지만 강의실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된 것이다. 이 강의는 이후 그녀가 농부의 길을 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농업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딸이라 평소에 농사를 가르쳐주지도 않으셨는데, 새벽에 일어나 논·밭에 나가고 쌀 포장에 식품 포장까지 3년을 꼬박 머슴처럼 살았어요.”

농업회사법인 대표이사가 되다

이렇게 3년이 지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3년 전 단식기도로 상한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100일 기도에 들어갔다. “고흥 팔공산에 텐트를 치고 단식기도에 들어 가셨는데, 그해 한파가 유독 심했어요. 걱정 끝에 어머니가 88일 만에 아버지를 찾아갔는데 기도하던 모습 그대로 발견되셨어요.”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맏이인 그녀는 아버지의 가업을 한꺼번에 이어받게 됐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니 서류상 대표가 돼 버린 거예요. 그전까지 안일하게 살고 농사 쉽네, 가볍게 생각했거든요. 아버지는 벼농사 달인, 어머니는 식품 가공 전문가 그래서 저는 우리 농장과 연계한 교육원 같은 거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경영을 고민해야 했던 거죠.”

부모님 밑에서 수동적으로 일을 하던 그녀는 농업회사법인의 대표가 됐다. 강 대표는 아버지를 이어서 열심히 일을 했다. “워커홀릭(일중독자)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3년간 일만 했어요.” 그리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6년 동안 벌교에 계속 있었는데 친구가 누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이후 3년간 대학원도 가고 서울에도 가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청년농업인들과 뭔가 할 자신이 생겼어요.”

그녀는 이때부터 젊은 농부들이 모이는 자리에 찾아가기 시작했다. “2014년 영파머스 교육이 있었어요. 보성에서 4-H에도 나갔어요. 가보니 우리집 앞에서 딸기 농사하는 친구도 있고, 초등학교 친구는 벼농사를 짓고 있더라고요. 주변에 농사짓는 친구들이 참 많았어요. 그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 보니 농사이야기가 쏙쏙 들어오는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 얘기와는 다른 실생활 용어로 소통하게 되니까요. 또래 소통이 이런 장점이 있구나 생각하게 된 거죠.”

본격적으로 청년농민들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청년CEO연합회 사무국장도 맡고, 전남 지오쿱을 함께 만들기도 했다. “전남청년농부협동조합 지오쿱(ZIOCOOP) 만들 때는 너무 재밌었어요. 낮에 농사일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밤새워 회의를 해도 즐겁고요. 그런데 막상 활동들을 하면서 현실적인 어려움과 불편한 점들이 생겼어요. 기반이 약한 청년들이 모이다보니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고, 지원을 받다보면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길만 갈 수 없는 제약들이 있었습니다.”

정부나 농협에서 후원하는 단체 활동은 재정적이나 실무적인 지원이 많은 장점이 있지만 자유롭지 않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하는 단체를 만들고자 했다. 그것이 청년농업인연합회, ‘청연’을 만들게 된 계기였다.

2017년 12월 청년농업인연합회가 주최한 ‘청년, 農톡하다(청년들이 직접 만드는 농촌청년정책 토크테이블)’ 행사 모습. 한승호 기자
2017년 12월 청년농업인연합회가 주최한 ‘청년, 農톡하다(청년들이 직접 만드는 농촌청년정책 토크테이블)’ 행사 모습. 한승호 기자

청연을 만들다

“자립하는 조직을 만들고자 시작했는데 잘 안됐어요. 뭘 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런데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보면, 조금씩 나아진다’ 그런 생각을 했고 이게 청연의 시작이고 모토인 셈이에요.”

청년들은 젊은이의 도전정신으로 ‘청연’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갔다. 2017년 7월 강 대표 농장에서 발대식을 갖고 그해 11월 최초의 청년농민 자주적 조직 청년농업인연합회가 출범했다. 그리고 이들은 청년답게 발랄하고 재미있게 농업을 알려내고 있다.

“머니쇼라는 박람회에 참가했어요. 금융업체 박람회에 청연이 참여해서 먹거리 소개하고 라이스 클레이 체험하면서 ‘우리는 농부다’라고 내세웠어요. 깔끔하게 차려입은 청년들이 화이트컬러들에게 농산물을 소개하고 판매했죠. 초록우산 어린이집 행사에도 참석해서 청년농민들이 외모도 돋보이게 신경 쓰고 재미있게 행사를 만들어 갔어요.”

광장의 장터가 아닌 의외의 행사장에서 당당히 청년농부임을 드러내고 농민들의 농산물장터가 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새로운 모습으로 농업을 알려냈다. 작은 경험들을 축척한 이들은 작년에 ‘청년농업인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청년농부들이 기획하고 준비했어요. 젊은 감각에 맞게 농업인의 날 축제를 만든 거죠. 예를 들어 가위바위보, 썸 타는 청년농부 코너를 만들고 그때가 할로윈 주간이라 할로윈을 앞세웠어요. 농민축제에 할로윈이 생뚱맞다고 생각하시죠? 할로윈은 수확을 축하하는 의미더라고요. 우리는 할로윈의 메시지를 따서 필요한 것만 쓰기로 했어요. 호응이 아주 좋았어요. 젊은 엄마들이 할로윈 복장을 한 아이들을 데리고 기념품을 받으면서 즐기고, 청년문화를 접목시켰더니 청소년들이 와서 하루 종일 같이 놀았어요. 홍대에서 이디엠팀도 불렀다니까요.”

돈이 없어서 충남 논산의 작은 장소를 선택했지만, 축제는 성공적이었다. 돌풍이 불어 예정된 축제를 서둘러 마쳐야 했던 것은 두고두고 남는 아쉬움이다. 이 축제는 청년농부들이 자체 후원금을 모으고 어떤 이는 개인이 받은 상금 전액을 투척하기도 했다.

차라리 치킨 배달비 지원 정책이 필요

“청년들은 도전정신도 있지만 의존적이기도 해요. 현실적으로 어려우니까 빨리 뭔가 결과를 만들려는 요구도 크고요. 청년농부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에 많은 제안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계속 흔들려요. 하지만 걸리는 부분을 찾아서 이야기하면 다 수긍해요. 이것만 확고히 하면 청연은 흔들림 없이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조직으로 발전할 거예요. 회원들의 제일 관심사는 농산물 판매예요. 우리가 유통망이 있는 게 아니라서 많이 팔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서고 있어요. 우리는 매장에는 약하지만 현장에 강해요. 소비자를 직접 만나는 직거래에 강한 거죠. 누군가 새로 개발한 것을 올리면 다양한 의견으로 도움을 줘요. 단톡방을 통해서 병충해 상태를 올리면 바로바로 회원들의 경험과 정보가 올라와 도움을 주고 있어요.”

젊은이들이 도전적이라고 하지만 대체로 의존성이 강하다. 특히 청년농민이 주목을 받고 다양하게 소비되면서 청년농민에겐 지원사업이 항상 따라다닌다. 그런데 청연은 스스로의 자주·자립을 최고의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회원들은 집단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가고 있다.

끝으로 그녀는 청년농민정책에 대해 “청년농민을 육성한다고 거창한 지원을 하는 건 원치 않아요. 스마트팜 혁신밸리에 1,200억원씩 쓰지 말고 차라리 농촌마을에 치킨 한 마리 배달할 때 붙는 배달비 지원이 훨씬 필요해요”라고 말했다. 거창하고 그럴듯한 정책이 아닌 농촌에 사는 사람들만 아는 불편함, 청년농민들 일상에 필요한 것을 만들어달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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