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낙태죄가 헌법불일치? 무슨 말이랴

  • 입력 2019.04.21 18:00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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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농사를 짓고 살다보면 다른 어떤 직업군보다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가 쉽습니다. 돌아서면 풀이 돋아나고 돌아서면 풀이 자라나서 농민들의 손을 붙잡을라치면 시간이 빛의 속도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또 어떤 것은 변하고 있는데도 변화를 감지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습니다. 특히 먹고사는 문제와 조금 동떨어진 듯 느껴지는 사회문제에 대해서 그렇지요. 일련의 변화가 생겨나도 그 변화의 방향이 정주행인지 역주행인지 가늠하는 것조차 유보하고는 나몰라라 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최근엔 무엇일까요? 네,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일치 판결입니다.

지난 11일, 헌법재판소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 있었습니다. 형법 제269조 1항과 270조 1항의 낙태죄가 헌법과 불일치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동안 여성계에서 끊임없이 주장해오던 내용이고, 게다가 지난 2012년 판결에서의 합치라는 결론과 정면 배치되는 까닭에 더욱 반갑고 소중한 판결이라 환영해마지 않고 있습니다.

쟁점이던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대립적인 구도로 설정될 것이 아니라, 태아의 생명보호를 위해서는 여성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태아의 생명권은 여성의 신체적·사회적 보호를 포함할 때 실질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동안 여성계에서는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라는 다소 강한 주장을 펼쳐왔습니다. 온전히 육아를 할 수 없는 조건과 각종 성범죄 등의 문제가 개별의 선택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임에도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법적·윤리적 책임을 여성만 져온 게 사실이니까요.

사실 수많은 여성들이 낙태를 경험했습니다. 여성농민들도 마찬가지지요. 가족계획이 한창 유행하던 시기에 보건소에서 홍보하던 피임기구의 불능으로 임신된 사례도 많았지요.

그럴 경우 여지없이 낙태를 했지만 윤리적 문제에서도 더 많이 괴로웠고, 그 몸을 하고도 몸져 누워있기보다는 다음날 곧장 밭에서 김을 매고 들일을 하며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습니다.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은 일을 감행한 부도덕성에 대한 죄책감조차 온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겨진 채 말입니다.

산부인과에 들어서게 됐을 때도 낙태를 요구할 때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뭔가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듯 위축된 행동을 했습니다. 무엇이 여성으로 하여금 그렇게 조심스럽게 했을까요? 바로 낙태죄였겠지요. 여성의 몸이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생명임에도 마치 공공연히 살생한 것처럼의 인식, 낙태죄에 있었던 것이지요.

이번 판결로 연내에 새로이 법 개정을 한다하니 다행스런 일입니다. 물론 원치 않는 임신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또는 임신상태가 되면 주저 없이 출산할 수 있는 여건이게끔 사회를 변화시키는 노력도 해야겠지요. 이렇게 세상은 여성들의 말에 조금은 귀를 기울이기도 하네요. 젊은 사람이 없는 농촌에서는 관심 밖의 일이기도 하지만 참 중요한 문제에 변화가 있다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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