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우표⑤ 조폐공사 하늘에서 ‘우표비’가 내렸다

  • 입력 2019.04.21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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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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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를 인쇄하다보면 기계에 종이가 겹쳐 들어가거나, 잉크가 번지거나, 혹은 구멍을 뚫는 점선이 엉뚱한 곳으로 비켜나는 등의 오류가 발생하여 상당히 많은 파지가 생겨났다. 하지만 인쇄가 잘 못 됐다고 해서 연애편지 쓰다 틀렸을 때처럼 그 파지를 아무렇게나 구겨서 휴지통에 내던졌다간, 공무원 밥줄 놓을 각오를 해야 했다.

바로 그런 인쇄상의 오류가 발생해서 잘 못 인쇄된 진귀한 우표를 ‘버라이어티’라고 부른다 했는데, 수집상에서는 정품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됐기 때문에, 그 버라이어티에 군침을 삼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와 비례해서 한 조각의 파지라도 유출되지 않도록 하려는 당국의 감시도 매우 엄격하였다.

“체신부에서 조폐공사에 인쇄를 의뢰할 때 제공하는 우표용지는 그 뒷면에 이미 풀칠 처리가 돼 있어요. 그런데 해방 초기에는 우표를 다 인쇄한 다음에 풀을 발랐거든요. 감자녹말로 쑨 ‘감자풀’을 빗자루에다 묻혀서 장판지 바르듯이 쓰윽 쓱, 그렇게요. 그런 다음에 선을 따라서 구멍을 내는 타공작업을 했지요.”

왕년의 체신부 직원 김동권 씨의 증언이다.

자, 이제 인쇄가 끝났으면 체신부와 조폐공사 인쇄소 사이에 ‘용지 정산’을 해야 한다. 인쇄된 우표의 매수와 파지의 수량이 애당초 지급한 그것과 딱 맞아 떨어져야 한다. 용지 정산을 마치면 잘 못 인쇄된 우표용지를 소각처리를 해야 한다. 물론 소각작업도 체신부 공무원의 감시 하에 이뤄졌다.

“어느 땐가는 내가 우표를 인수하러 조폐공사 인쇄소에 갔었는데, 나를 소각장으로 안내하던 직원이 나한테 묻는 거예요. 혹시 우표비를 맞아봤느냐고…. 그날 우표비라는 말을 처음 들었고, 실제로도 우표비가 내리는 모습도 처음 봤어요.”

잘 못 인쇄된 파지 뭉치를 일단 소각로에 넣고 불을 붙인다. 혹시 종이가 겹쳐서 타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안 되니까 소각로 내부에 설치된 환풍기로 회오리바람을 일으켜서 파지더미를 휘저어 태운다. 그러면 굴뚝을 통해 날아오른 재가 부옇게 하늘에서 맴돌다가 내리는데…직원들이 그것을 ‘우표비’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소각로 밖으로 나와서 하늘을 봤는데 참말 장관이었어요. 우표용지에는 우표 하나 크기만큼 절단 선을 따라서 죽 구멍이 뚫려 있잖겠어요? 그러니까 타고 남은 재 역시 딱 우표 하나 크기만큼으로 조각조각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나풀거리면서 땅으로 내리는데…참 볼만 했어요.”

40년 동안 체신부에서 우정업무를 담당하다가 1984년에 퇴임했던 김동권 씨는, 이후로도 그 ‘우표비’ 내리던 모습이 삼삼하게 떠오른다 했다.

우표수집 전문가인 김갑식 씨의 얘기에 따르면 세계 1,2차 대전이 일어났던 시기에, 점령군의 장교들이 약소국인 피침국의 우표를 가지고 떼돈을 벌었던 사례가 많았다고 얘기한다.

그렇게 보면 6.25 전쟁 시기의 대한민국은 미군장교들의 돈벌이 대상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의 한국인들은, 우표는 편지 부칠 때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여길 만큼 ‘수집’에 대한 관심이나 인식이 터럭만치도 없었다.

체신부에서는 서울에 있던 인쇄기를 부랴부랴 피란지인 부산으로 가져갔다. 16개 유엔회원국의 참전을 기념하여 ‘참전기념우표’를 부산에서 발행하였다. 오른쪽에 태극기를, 왼쪽에 각각 참전국의 국기를 배치한 도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산의 임시청사에 미군 고위 장교가 전화를 해서는 ‘참전기념우표-미국편’을 추가로 인쇄를 해달라고 요청을 해왔다. 미군 장교가 사적으로 한국의 ‘정부’에다 대고 우표를 더 인쇄해 달라고 했으니, 그건 심히 부당한 처사였으나…뭐, 어쩌겠는가. 그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우표는 수천 장을 인쇄해 놓아도 부피가 크지 않기 때문에, 둘둘 말아서 본국으로 보내기가 간편하였다. 그 미군 장교들은 한국전쟁 기념우표로 뒷날 벼락부자가 됐다던가, 어쨌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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