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우표④ 우표, 불량품이 귀한 대접 받는다

  • 입력 2019.04.14 20:03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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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발행하는 우표 도안에는 대개 그 나라의 국왕, 작고한 정치 지도자, 역사적인 인물, 특산물, 전통문화와 관련된 상징물 등이 소재로 활용돼 왔다. 그렇다면 우표는 어떤 절차를 거쳐서 만들었을까?

일제 말인 1943년에 체신공무원으로 임용되어서 40여 년 동안 주로 우표발행 관련 업무를 해왔다는 김동권 씨와 함께 우표발행에 얽힌 이모저모를 알아보기로 한다.

“체신부에서는 연초에, 아예 그 해의 우표 발행 계획을 미리 세워서 공표를 하지요. 하지만 그건 ‘보통우표’의 경우이고요, 올해가 광복 몇 주년이니 그 기념으로 우표를 발행해 달라는 요청을 총무처에서 해오기도 하고, 금년이 건군 몇 주년이니 그와 관련된 특별우표를 발행해 달라는 요청을 국방부에서 해오기도 하지요. 그런 요청에 따라 발행하는 우표를 ‘기념우표’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보통우표의 경우 체신부에서 임의로 소재를 정해서 막 찍어내는 게 아니다.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우표발행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다음에 결정이 되는데 그 논의과정이 또한 간단치가 않다.

-내년 상반기에 우편요금을 인상하게 되면 보통우표를 바꿔야 하는데, 우리나라 곤충 시리즈로 장수하늘소를 도안에 넣자는 추천이 들어와 있습니다. 오늘 곤충전문가도 특별히 모셔왔으니 의논들 해보십시다.

-장수하늘소라…그것이 우표에 소개될 만큼 우리나라 곤충으로서의 대표성이 있습니까?

-장수하늘소는 딱정벌레목 하늘소과에 속하는 곤충인데 만주지방하고 시베리아 근방, 그리고 우리나라로 서식지가 국한돼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218호로 지정돼 있기도 하고요.

-제가 화가의 입장에서 말씀 드리자면, 우표에는 장수하늘소 수컷을 쓰는 게 좋겠습니다.

-왜 하필 수놈입니까? 여성단체에서 들고 일어나면 어떡하려고….

-곤충도감에서 사진을 봤는데 수놈이 암놈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멋있더라고요.

-맞아요, 촉각(觸角)도 수컷이 더 길고 전체적으로 훨씬 화려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논의 과정을 거쳐서 소재가 결정되면 우표에 실을 그림이나 사진을 구해야 하는데, 김동권 씨가 체신부에 근무했던 당시만 해도 동식물이 대상인 경우에는 철저히 현지에 가서 실물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고 한다. 가령 진돗개를 우표에 담기로 했다면, 도안사와 사진사 등을 진도 현지에 파견해서 그중 인물이 좋은 녀석을 골라 모델로 선정하였다는 얘기다.

소재가 정해지면 미술 분야 전문가들의 감수를 거쳐서 시안을 만든 다음, 조폐공사 인쇄소로 보낸다. 거기서 색도를 다양하게 조판을 해서 시험인쇄로 일단 몇 장을 뽑은 다음에, 최종적으로 체신부 장관이 그 중 하나를 선택해서 결재를 하면, 그 때부터 인쇄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표는 조폐공사에서 화폐에 준하여 철저히 인쇄관리를 하기 때문에 도중에 유출되는 경우가 없으나, 해방 직후에는 민간인쇄소에 맡겨 인쇄를 했으므로 그만큼 관리가 허술했다. 어느 날 체신부의 우표 담당 김 계장이 인쇄소에 찾아왔다.

“사장님, 지난번에 시험인쇄 했던 나비그림하고 꽃그림 우표 말입니다. 그거 색상별로 두 세트씩만 더 인쇄해 주세요. 결재 받아야 하니까.”

“아니, 지난번에 장관님 결재용이라면서 가져가지 않았습니까.”

“우표 하나를 발행하려면 몇 군데 결재를 받아야 하는지 아세요? 하여튼 필요해서 그러니까 두 세트씩 더 만들어 줘요.”

후후, 순 거짓말이다. 시험인쇄를 한 우표는 다양한 색상구성으로 만든 시안이기 때문에, 그 희귀성으로 치자면, 나중에 시중에 나올 정품우표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인쇄기술이 허술했던 탓에 선이 겹치거나 색이 번지는 등 잘못 인쇄돼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것을 놓치지 않고 빼돌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집가들은 그런 우표를 버라이어티(variety)라 부른다. 그들은 그런 우표가 수중에 들어오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짐짓 고상하게 이렇게 너스레를 떤다.

“흐음, 이것은 인쇄공학적 차원의 연구가치가 매우 큰 희귀품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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