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볍씨·트랙터 다 탔는데 … 농사지을 기력이 있겠나”

강원도 고성 산불 피해 농민들 ‘망연자실’
“몸만 겨우 피했다 돌아오니 폐허만 남았다”
주택은 물론 파종기·트랙터까지, ‘화마’가 삼켜

  • 입력 2019.04.14 17:05
  • 수정 2019.04.15 08:48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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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지난 4일 강원도 고성에서 발생한 산불로 주택 및 농기계, 창고 등이 불에 타 큰 피해를 입은 토성면 성천리 마을에서 10일 한 주민이 처참히 무너져 내린 집 주변을 살펴보고 있다. 이장에 따르면 이 마을 100가구 중 57가구가 주택 전소 혹은 반파 피해를 입었다. 한승호 기자
지난 4일 강원도 고성에서 발생한 산불로 주택 및 농기계, 창고 등이 불에 타 큰 피해를 입은 토성면 성천리 마을에서 10일 한 주민이 처참히 무너져 내린 집 주변을 살펴보고 있다. 이장에 따르면 이 마을 100가구 중 57가구가 주택 전소 혹은 반파 피해를 입었다. 한승호 기자
지난 10일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천리의 한 농가주택이 전소된 채 방치돼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10일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천리의 한 농가주택이 전소된 채 방치돼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10일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천리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창고가 불에 전소된 채 방치돼 있다.
지난 10일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천리 마을의 불에 전소된 채 뼈대만 남은 창고가 당시 산불의 위력을 실감케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4일 강원도 고성에서 발생한 산불은 기록적인 규모의 피해를 남겼다. 당시 바람이 워낙 강해 최초 발화지점으로부터 가까운 농촌마을들은 대부분 불길을 피할 수 없었다.

많은 농민들은 그야말로 몸만 빠져나왔다가 집과 생계수단을 동시에 잃은 상황이다. 시간이 흐르며 각 마을회관에는 구호물자가 제법 쌓이고 당장 잠잘 곳도 그런대로 마련됐지만, 주민들은 무엇보다도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괴로워하고 있다.

대당 1억원에 이르는 트랙터에서부터, 바쁜 농민들의 발이 돼 준 100cc짜리 오토바이까지, 토성면사무소에 설치된 종합상황실에 따르면 이번 화재로 고성군에서 불에 탄 농기계 및 농작업기는 29대의 트랙터를 포함해 총 869대에 이른다.

농기계창고 115동이 함께 불에 탔고, 비닐하우스도 63동이 사라졌다. 농작물피해는 품목 도합 7만4,000여주로 파악되고 있다. 화마가 농번기 직전에 덮친 탓에, 부지런한 농민들이 집이나 창고에 미리 적재해둔 농자재들도 상당수 전소돼 재산피해를 키웠다. 볍씨는 총 1만7,000여kg, 비료는 5만포 가까이 타버렸다.

이 통계는 농가들의 피해 신고를 종합한 것으로, 공식 실태조사가 시작되면 피해는 더욱 불어날 여지가 크다.

최초발화가 일어났던 원암리와 인접한 성천리는 시설물 피해신고가 가장 많이 접수된 마을이다. 성천리를 방문했던 지난 10일, 밖은 장대비가 퍼붓는 통에 성천리 주민들은 구호물자가 쌓여 비좁은 마을회관에 모여 앉아 있었다.

사실 비가 오지 않아도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했다. 행정에서 제공하는 점심식사를 기다리고 있던 주민들은 피해 입증 때문에 실태조사가 나올 때까지 현장을 섣불리 치울 수도 없다고 말했다.

“농사지을 기력이 있겠나. 하우스고 볍씨고 다 탔는데. 트랙터도 많이 타 버렸고, 농업기술센터에서 (트랙터) 3대를 여기에 상주시킨다니까 그래도 어떻게든 지어봐야죠.”

탁창석 성천리 이장에 따르면, 이 마을 100가구 중 57가구의 주택이 전소 혹은 반파 피해를 입었다. 마을을 돌아보니 소규모 노후주택이나 가건물에 가까운 창고들은 대부분 폐허로 변해 있었다.

“거의 뭐 싹 쓸어 갔지. (신속하게) 방송으로, 싸이렌으로 난리를 쳐서 그래도 인명 피해는 없었지. 영화에서나 보던 불덩이가 바람 타고 날아오더라고. 차로 그냥 다 태워서 도망갈 수밖에 없었지.”

그저 주저앉지 않고 서 있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 벽돌이나 시멘트로 지은 집들 역시 불덩이를 제대로 맞았을 경우 전소를 면치 못했다. 그나마 이쪽은 한쪽 면만 그을린 채 버틴 집들이 존재했다.

“제가 17살부터 지금까지 농사만 지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누가 예상할 수 있겠어요. 이 많은 세대 중 화재보험에 가입한 곳은 딱 두 집이에요.”

쌀농사를 짓는 주민 탁종현(72)씨의 벽돌집이 그랬다. 타버린 벽면에 붙어있던 도시가스 관이 끊겨, 군청에서 임시로 달아준 하얀 LPG 가스통이 새까만 벽면과 대조를 이뤘다. 90년대 초반에 튼튼하게 지은 집은 다행스럽게도 한쪽 겉면만 탔지만, 탁씨는 작은 창고 두 개와 비닐하우스, 그리고 그 속에 있던 수많은 농기계를 잃었다.

“도망갈 때 트랙터만 겨우 앞쪽을 싸매두고 갔어요. 돌아와서 보니 다행히 시동이 걸리더라고요. 그런데 나머지, 이앙기, 발아기, 파종기 할 것 없이 다 탔어요.”

집 마당에 가건물로 지어뒀던 창고는 폐허만 남아 있었다. 형체를 유지하며 서 있는 철제 고추 건조기와 뼈대만 남은 오토바이 등의 흔적이 겨우 이 자리에 농사꾼의 창고가 있었음을 짐작케 했다. 불은 농번기를 대비해 미리 사서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트랙터 바퀴와 쌓아둔 비료까지 남김없이 태웠다. 탁씨는 상황을 타개할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트랙터까지 탄 사람들도 허다하고…. 집만 다시 지으려고 해도 몇억은 드는데, 집은 둘째 치고 이 상황에서 계속 농사지으려면 농기구란 농기구는 전부 새로 사야 해요. 대출을 알선해준다고는 하지만 농민들은 결국 빚더미에 오를 수밖에 없을 것인데, 선뜻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농민들이 계속 농사지을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이 필요합니다.”

이날 마을엔 한 농기계 회사가 보낸 정비지원 차량이 벌써부터 돌아다니고 있었다. 빚을 내 농기계를 구입하고, 매년 그 상환에 허덕이는 현실에 처한 농민들 가운데 농기계종합보험에 든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정부와 농협이 총력지원을 선언했지만, 화상을 입은 농촌이 완벽히 제 모습을 찾기 위해선 무언가 더 큰 결단이 필요해 보였다.

토성면 원암리에 있는 한 축사와 트랙터 등 각종 농기자재들이 산불로 인해 전소된 채 방치돼 있다. 한승호 기자
토성면 원암리에 있는 한 축사와 트랙터 등 각종 농기자재들이 산불로 인해 전소된 채 방치돼 있다. 한승호 기자
고성 산불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지난 10일 원암리 마을회관에 모여 구호물자를 지급받고 있다. 한승호 기자
고성 산불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지난 10일 원암리 마을회관에 모여 구호물자를 지급받고 있다.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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