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15]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 입력 2019.04.14 18:00
  • 수정 2019.04.15 09:48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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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탁 소설가
최용탁 소설가

<제15회>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하자, 전국에서 크게 의병이 일어나니 이를 정미의병이라 한다. 을미, 을사에서 이어진 의병은 이때에 이르러 세력이 가장 강대해졌다.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 군인 3,000여 명이 가담하면서 전력이 배가된 것이다. 전국에 흩어진 채로 일제와 맞서던 의병들은 마침내 연합전선을 구성하게 되고 이를 ‘13도 창의군’이라 이름 지었다. 문경에서 은거하던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허위를 군사장으로 삼고 민긍호, 이강년 등 각 지역의 의병장들을 세웠는데, 안타깝게도 하나같이 양반들이었다. 평민 출신인 신돌석이나 포수 출신 홍범도 등이 호응하여 양주에 도착했지만 이들은 지도부에 들어가지 못했다.

13도 창의군을 결성한 연합 의병의 수는 무려 만여 명에 달했다. 그들은 각국 공사관에 편지를 보내어 항일 의병은 합법적인 교전 단체라 선포하고 한양으로 진격해갔다. 그리고 허위가 이끄는 300명의 선발대가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일군은 수천 명의 보병과 기마병으로 망우리 일대 군사요충지를 선점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결사대원이 앞장서 필사적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열악한 화승총으로는 뛰어난 화력의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갑오년부터 이어져온 중과부적의 화력 차이는 의병들에게도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각도 의병진들이 기일 내에 도착하지 않아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때 총대장 이인영에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날아들었고, 그는 삼년상을 치른다며 고향으로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서울 진격에 실패하고 총대장마저 사라진 13도 창의군은 급격하게 세를 잃었다. 결국 의병 부대들은 다시 지방으로 흩어져 각자 항쟁을 전개하게 된다. 13도 창의군은 최초로 벌어진 의병들의 대규모 연합 작전이었다는 점에는 의의가 있지만 별 성과는 내지 못했다. 양반 출신 의병장들만을 모집해 평민 의병들의 지지를 잃었고, 물량이나 훈련도 일본군에 미치지 못했다. 소규모 게릴라전이 아닌 대규모 공격을 펼치기에는 무리였던 것이다.

체포된 호남의 의병장들.
체포된 호남의 의병장들.

신돌석은 일찍이 19살이던 을미년에 일어나 10년 넘게 경상도와 강원도를 주름잡았던 전설적인 의병장이었다. 정미의병 무렵에는 그의 휘하에 3,000을 헤아리는 의병이 결집해 있었다. 영해대장군, 혹은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신돌석도 일제의 대대적인 반격에 정미 거병 이듬해부터 세력이 약화되었다. 결국 현상금에 눈먼 옛 부하의 도끼날에 목숨을 잃게 되니 그의 나이 고작 서른이었다. 정미의병 지도부였던 세 사람의 운명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 의병장 허위.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 의병장 허위.

전쟁을 선포한 의병 총대장으로서 아버지의 삼년상이라는 유교적 굴레를 끝내 벗지 못한 이인영은 1909년에 체포되었고 내란죄로 교수형을 언도받아 처형당했다. 이인영이 내려간 후 실질적인 지도자가 된 왕산 허위는 유격 전술로 소단위의 게릴라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연합부대를 지휘하면서 1908년 2월 가평, 적성 방면의 의병 5,000명을 집결시키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무기를 제조하는 등 의병장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허위도 그 해 5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강원도 일대에서 가장 큰 의병부대를 거느리면서 의병부대를 소단위로 편성하여 강원도·충청도·경상도 등지에서 100여 회의 전투를 벌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준 민긍호 역시 그 해에 체포되어 사살당했다. 가장 늦게까지 저항했던 호남의 의병들은 피살된 숫자만 수천여 명을 헤아렸다. 이를 역사에서 ‘남조선 대토벌 작전’이라 부른다. 가혹한 토벌로 일제에 항거하는 움직임을 아예 뿌리 뽑으려 했지만, 의병은 곧 독립군으로 이어진다. 나라를 빼앗긴 후 즉시 해외에 우후죽순처럼 독립군 기지가 만들어졌다. 고질이었던 반상의 구별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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