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정재룡 영감③

  • 입력 2019.04.14 18:00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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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출하 작업은 간단하다. 나무상자 바닥에 신문지부터 한 장 놓고 그 위에 왕겨를 깐 뒤 능금을 담는데, 능금과 능금 사이, 능금과 나무상자 사이 공간은 왕겨로 채우고 흔들어 빈틈이 없게 한다. 왕겨는 운반 과정에서 능금에게 주는 충격을 흡수하고 또 얼지 않게 하는 방한효과도 있었다. 남자 두 사람이 창고에서 상자를 들어내 두툼하게 짚이 깔린 바닥에 쏟아놓으면 여자들이 크기별로 세 단계로 분류(이런 손작업 분류 방식은 70년대에 들어 선별기로 바뀌는데, 그때 선별기란 것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처럼 무게 중심의 저울형이 아니라 크기에 따라 밑으로 떨어지는 원시형이었다)해서 담아낸다. 그러면 머슴 둘이 상자 위에 짚이나 마분지로 덮고 양쪽을 새끼로 묶으면 작업이 마무리 된다.

잔소리 한마디 없이 작업하는 일을 이윽히 지켜보던 정재룡 영감은 대문 앞에 택시가 도착하자 서둘러서 집을 나선다. 오늘 첫개시한 삼백 상자는 영천역에서 화물기차에 실려 청량리역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역에 들러 접수해놓기 위해서였다. 작업이 끝나면 머슴들이 우차 두 대가 능금상자를 역으로 실어 나를 것이다. 머슴 중에는 포로수용소 출신 그 사내도 있었다.

이튿날, 정재룡 영감은 청량리행 완행열차에 엉덩이를 부려놓았다. 한 해에 딱 한번 걸음을 하는 것이지만 영천역에서 청량리까지 가는 일은 여간 곤욕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대로 간다고 해도 열두세 시간이고 연착만 하면 열다섯 시간이 보통이었다. 벌써 몇 년 전부터 이번이 마지막 길이라고 마음을 다잡고는 했지만 막상 첫 출하 능금 경매가 있기 전날이면 길나서는 버릇은 좀처럼 고쳐지지가 않았다. 십 년도 훨씬 전에 과물조합 한 직원이 주선해서 서울 공판장 경매를 직접 지켜본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은 나들이였다. 정재룡 영감이 굳이 해마다 청량리로 가는 이유는 이미 앞에서 밝혔다(그러나 그 모든 걸 어찌 이 자리에서 밝히랴).

여기저기 화려한 직함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어 본받아 배울만한 본보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정재룡 영감의 꼬질꼬질한 사생활을 버선목 뒤집듯 내게 까발려준 사람은 다름 아닌 영천포로수용소 출신 그 사내였다. 그는 정재룡 영감 능금밭 머슴 중의 한 사람이었고, 영천 바닥에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과 입이 자물통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생활 심부름을 많이 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 무렵 막 뒤늦은 결혼을 했던 내야 어릴 적부터 말로만 들었고, 멀리서 뒷모습만 몇 번 바라보았을 뿐인 정재룡 영감 이야기를 들으며 그러나 털끝만치도 그를 비난할 생각은 일지 않았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사내란 것들의 본성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나는 동갑내기면서 머슴과 주인인 두 사내를 머릿속에 깊이 박아두었다.

그렇게 정재룡 영감이 십여 년에 걸쳐 서울에서 데려온 젊은 여자는 꽤 여러 명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읍내 여기저기 가족들도 모르는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었다. 데리고 온 여자는 그 집에서 한두 해나 두세 해쯤 머물며 지역 물정을 익힌 뒤 장사를 시작했는데, 대개가 사내들과 눈이 맞아 바닥을 뜨거나 읍내 어딘가로 잠적해버렸다. 정재룡 영감이 여자에게 장사를 허용한 것은 새들의 이소(離巢)와도 같은 것이었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여자에게 관심이 멀어졌다는 표시라고 해야 옳겠다. 여자가 어딘가로 종적을 감추거나 다른 사내에게 눈을 돌리는 낌새가 보이면, 영감은 서울 공판장으로 올라가기 전 포로수용소 출신 머슴에게 일러 읍내 어느 한 집을 비우게 했다. 그는 떠난 여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으로 다른 여자를 불러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주 영악한 즘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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