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우표③ 힘들다, ‘우표 독립’

  • 입력 2019.04.07 20:11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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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우정국 낙성식을 기회로 삼아 거사하였던 갑신정변이 결국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의 집권은 삼일천하로 끝나버렸다. 더불어서, 그들 개화파가 꿈꾸었던 ‘우편 행정 근대화’ 정책도 물거품이 되었다. 따라서 일본 대장성에 인쇄를 의뢰하여 미리 제작했던 일명 ‘문위우표’(2종)는 그중 극히 일부가 서울-인천 사이를 오간 서신을 통해 20일 가량 통용되다가 그 쓸모를 다했다.

그런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갑신정변 파동으로 우편업무 자체가 중단돼버린 상황에서, 애당초 국제우편용으로 제작 주문을 했던 세 종류의 고액권 우표가 뒤늦게 일본으로부터 도착한 것이다. 그 수량도 무려 130만 장이나 되었다. 하지만 이미 우표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터라,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었으므로 폐기처분을 하는 이외에 달리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 대장성에 막대한 인쇄비를 결제해 주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쓰지 못 할 우표’의 처리 문제를 두고 조선 조정에서 골머리를 싸매고 있던 그때, 그야말로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나 다름없던 그 우표뭉치를 돈을 주고 구입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우표 전량을 자신에게 넘기면 그 대신 일본 대장성에 갚아야 할 인쇄비 전액을 자신이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비록 쓸모는 없어졌으나 ‘조선 최초’라는 상품가치를 선전해서, 세계 각국의 우표 수집상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려는 요량이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무역업을 하던 외국인이 그 우표를 인수한 것으로 알려졌어요. 지금 그 우표는 우리나라에는 별로 남아있지 않으나 외국에서는 흔하게 발견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이긴 하지만 수량이 워낙 많기 때문에, 오히려 요즘 발행되는 우표보다 더 헐값이에요. 우표를 실제 사용했다는 증표로서 도장이 찍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기도 하고….”

우표 수집가 김갑식 씨의 얘기다. 실제로 외무아문(外務衙門, 외교업무를 당당했던 구한말의 행정관서)의 문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그때 우표를 인수한 외국인은 마이어(Meyer)라는 독일 사람이었으며, 그가 제물포(인천)에 세운 무역회사의 이름은 ‘세창양행’이었다.

갑신정변 후 10여 년 동안 중단됐던 우정업무가 1895년에 부활하여, 태극문양이 도안된 우표를 미국에서 인쇄해왔다. 그 다음에는 프랑스로부터 인쇄를 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1905년에 한국의 통신권이 일제에 의해 박탈되면서, 그때로부터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는 일본에서 발행한 일본우표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45년 일제의 강압통치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통신주권도 해방을 맞았다.

“해방은 됐지만 곧바로 미군정이 들어섰잖아요. 비록 우리 정부를 수립하지는 못 했지만 일제 강점기 때의 우표를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새로 만들 형편은 못 되고…. 그래서 해방 직후에는 일제 때 쓰던 우표에다 ‘조선우표’라는 글자를 덧씌워서 인쇄한 것을 임시로 사용을 했으니…형편이 참으로 옹색했지요.”

1946년 5월 1일, 해방 후 최초의 우표인 ‘해방조선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우표 도안의 타이틀은 ‘가족과 국기’였다. 휘날리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담은 구성이었다. 더불어서 해방 기념 우편엽서도 발행했다. 특히 그 기념엽서는, 태극기를 든 사람이 일장기를 발로 밟고 서서 만세를 부르는 그림으로 구도를 짰다. 35년여 동안이나 국권을 강탈당했던 데 대한 울분과 해방의 감격을, 엽서 한 장에다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다른 공산품도 그러하듯이, 우표 역시 그 하단에다 작은 글씨로 우표를 인쇄한 ‘제조처’를 표시하게 돼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 해방 기념우표의 하단에는 작은 글씨로 ‘일본조폐인쇄국’이라는 글씨를 박아 넣어야 했다. 당장 우표를 찍어낼 인쇄 시설을 우리는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 뒤인 1946년 8월 15일에 광복 1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했는데, 그 기념우표는 비로소 서울에 소재한 ‘정교사’라는 인쇄소에서 찍어냈다. 우리 우표를, 온전하게 우리가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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