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투명인간들이 도맡은 농촌노동

  • 입력 2019.04.06 14:24
  • 수정 2019.05.29 11:12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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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3년도 더 된 내 얘기다. 꿈에 부풀어 프랑스로 공부를 하러 떠났다가 그 첫날에 여권이 든 가방을 도둑맞고 말았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비자를 건네고 1년짜리 체류증을 받기도 전에 벌어진 일. 좌절하고 원망할 새조차 없었다. 다름 아닌 내가, 까딱하면 뉴스에서나 보던 그 추방대상자가 될 판이었다.

애석하게도 외국인인 내 사정은 중요치 않았다. 학생비자를 빌미로 눌러앉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현지 경시청의 불편한 시선, 그리고 비협조적 태도와 싸워야 했다. 사실상 연장이 불가능한 임시체류증을 따낼 때까지, 무비자 체류기간 너머 반년 가까이를 불법체류 신분으로 지냈다. 꿈이 비자와 함께 날아가 무기력에 가까운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끝까지 싸우게 만든 것은 ‘불법체류자는 올바르지 못한 존재’라는 신념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자란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다.

농업의 세계로 들어선 이래 현장에서 인력 수급이나 인건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불법체류자’라는 호칭을 달면서까지 이 땅에서 버티고 있는 외국인노동자의 존재를 종종 듣곤 한다. 아주 가끔은 인건비·인력난에 시달리는 농민이 아니라 그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접하지만, 괘씸함이 앞서 이 문제에 대한 전체적 판단을 미뤘던 게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서 범법자를 흘겨보거나 그들의 처지를 외면하는 것은 독단이 아닐뿐더러, 스스로는 더욱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루던 내 생각의 정리보다, 위기에 놓인 현장의 요구가 빨랐다. 농촌에 갑자기 출입국사무소 직원들이 들락날락한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복잡한 심정과 함께 인력 문제에만 집중해 농촌을 들여다 본 나는, 농촌이 불법체류자로 가득 채워지는 현상이 단순히 이들 스스로의 선택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불법체류에 대한 아니꼬움도, 도의적 책임감도, 존폐의 기로에 놓인 농촌에선 이제 아무래도 좋은 문제다. 끊임없이 인력난에 시달리는 농민들은 농사를 유지하기 위해 무슨 수를 써서든 인력을 구하고 있었다. ‘투명인간’들을 아무리 단속해도 결코 완전히 없앨 수 없는 두터운 수요가 존재한다. 단속으로 공급이 줄 때마다 인건비가 상승해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질 뿐이다. 농촌에서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자국민도 없으니,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농촌을 함께 지탱하는 불편한 현실을 국가도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상황.

불법체류자가 발생하는 원인은 다름 아닌 우리의 수요 때문이다. 특히 농촌에서는 농업노동을 전담하다시피 책임지고 있는데도, 그 가치와 무관히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순을 우리 사회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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