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헌의 통일농업] 대북 쌀 지원에 관한 불편한 진실

  • 입력 2019.04.01 00:00
  • 기자명 이태헌((사)통일농수산사업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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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헌((사)통일농수산사업단 이사)
이태헌((사)통일농수산사업단 이사)

지난해 하반기부터 국제기구와 대북지원단체를 중심으로 북한에 밀가루를 여러 차례 지원했다. 그런데 정작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쌀 지원은 없었다. 이전과는 달리 이산가족 상봉을 계기로 대북 쌀 지원 건을 협의하던 움직임도 없었다. 북미 간의 주요 협상을 앞두고 있어 우리 정부는 여러 측면을 고려했으리란 짐작이다. 미국도 쌀 지원에 대해 흔쾌하지 않았을 터이고 북한도 그들 특유의 기세로 곤궁함을 버텼을 것이다.

통상 인도적 차원의 식량지원은 비정치적인 영역이며, 제재나 규제 하에서도 분명 운신의 폭이 넓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간에 식량을 나누는 일이 어느 때보다도 큰 정치적인 문제로 바뀌고 있으며, 북한에 대한 협상의 카드로도 변질되는 양상이다. 심지어 일부 보수논객들은 최근의 쌀값 인상이 북한에 쌀을 지원했기 때문이라는 거짓 주장을 펴기까지 했다.

대북 쌀 지원에 관한 불편한 진실은 이뿐만이 아니다. 퍼주기라는 비난을 덧씌우기도 하며, 일부에서는 군수용으로 전용될 것이라는 악의적인 해석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지난 몇 년 간 우리는 대북 쌀 지원을 중단했고, 국제기구들만 북한에 식량을 지원해 왔다. 그새 우리는 200만톤을 훨씬 웃도는 쌀 재고량을 안고 있다가 지난해는 70만톤의 쌀을 가축사료용으로 처분했어야 했다. 또 올해는 40만톤 정도를 사료용으로 처분해야 할지 모른다.

쌀 생산량이 30만톤 과잉이었던 2016년에는 변동직불제와 고정직불제로 2조원 이상의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다. 쌀을 창고에 보관하는 데만 5,000억원이 소요되었다. 장기보관에 따른 품위저하 및 유통기간 상실로 인한 장부상의 손실까지 감안한다면 쌀을 움켜쥐고 있는 비용은 천문학적인 수준이다. 쌀을 kg당 200원에 가축사료로 처분하는 동안 ‘양식의 귀함'도 잃었고 농심도 크게 손상되었다.

올해 농사를 눈앞에 두고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쌀값 걱정이다. 벼 재배 면적을 적정규모로 줄여가려던 농식품부의 생산조정 정책에 적신호가 켜졌기 때문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지난해 연말 벼 재배의향을 조사했던 결과보다 이번 3월초 조사에서 오히려 농민들의 재배의향면적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농민들의 재배의향이 실제 재배로 이어질 경우 올해 벼의 생산조정면적은 당초 목표했던 5만5,000ha의 13% 수준인 약 7,000ha에 그칠 전망이다. 이는 지난해 생산조정면적 1만1,446ha보다도 아주 낮은 수준이다. 추가 생산조정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올해 벼 생산량은 약 20만톤 과잉 생산될 전망이다. 반면 쌀 소비량은 1인당 연간 소비량이 60kg 이하로 떨어진 후 증가할 조짐은 없다. 대만이나 일본이 1인당 40~50kg 수준임을 감안하면 우리도 향후 소비량을 더 낮춰 잡아야 할지 모른다.

2월말 현재 산지 벼 재고량은 전년 동기 대비 21만톤 많은 것으로 추산된다. 이 때문에 지난 2016년 쌀 생산량이 적정생산량보다 약 30만톤 웃돌았을 때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많다. 당시 정부는 조기에 시장에서 산지 쌀의 상당량을 격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쌀값은 15%선까지 폭락했던 적이 있었다.

한반도 농업지대의 특성 상 남측에서는 쌀, 시설원예 등을 생산해 북측과 나누고 북측은 특작이나 축산, 자원 등을 통해 남측과 나누는 것이 적절하다. 분단농업으로는 각각의 처방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셈이다. 노령화된 우리 농민들이 쌀농사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벼농사는 기계화율이 아주 높은데다 정서적으로 ‘주식'을 생산하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농지보전의 중요성이나 다원적 기능 등의 농업 가치를 소홀히 할 수도 없다.

농민단체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북 쌀 지원을 재개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해 왔다. 이제 대북 쌀 지원 정책은 큰 틀에서 다시 짜야 하며, 이를 통해 남북이 상생하는 방안을 이끌어 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북한의 재해지역 주민에 대한 긴급지원 대책과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 대책, 그리고 개발협력을 촉진하는 식량지원 방안 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제반 인프라를 복구하지 못해 여전히 자연재해에 취약한 상태이며, 실제 홍수와 가뭄피해가 연이어 되풀이 되고 있다. 국제식량계획(WFP)에 따르면 북한의 취약계층은 250만명 수준인 것으로 보고되었다. 재해지역 주민과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은 통상적인 인도적 차원의 지원 성격이지만 보다 계획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개발협력을 촉진하는 식량제공 방식은 산림녹화, 지역개발, 인적자원개발 등에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대북 쌀 제공 방식의 일환으로 금강산관광사업 대가 또는 개성공단의 임금 등을 지불할 때 일부 금액에 대해서는 쌀로 대신 지불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겠다. 지난 10여년 전까지는 북의 식량난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대북 쌀 지원의 경우 긴급구호의 성격을 띤 일괄제공 방식을 취했다. 향후에는 지역별, 사업별로 지원방식을 다양화 할 필요가 있다.

남북 간에 식량을 나누는 것은 남북농업협력의 시작이며, 지속가능한 도달점이어야 한다. 아울러 이는 정부가 구상하는 신한반도 체제의 전략적 지렛대이기도 할 것이다. 대북 쌀 지원은 더 이상 그냥 퍼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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