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13] 잔혹한 무단통치

  • 입력 2019.04.01 00:00
  • 수정 2019.04.05 11:15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13회>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로 병탄되었다. 이로써 국호가 다시 ‘조선’으로 바뀌고, 통감부 대신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어 소위 총독정치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통치가 시작되었다. 총독부는 일왕의 직속기관으로 일왕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조선인에게는 일방적으로 복종만을 강요하는 유일한 권력기관이었다. 초대 총독은 3대 통감을 지낸 군인 출신의 테라우치였고 이후 해방 때까지 모든 총독은 군 출신이 맡았다. 그 중에도 테라우치는 소위 무단 통치를 내세워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잔혹한 식민지 지배체제를 만든 장본인이다.

조선총독부 건물.
조선총독부 건물.

무단통치는 헌병경찰제도에 기반을 둔 지배였다. 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10일 헌병경찰제도가 공포되어, 헌병이 경찰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헌병대 사령관이 총독부 경무총감을 겸임하고, 각도의 헌병사령관은 경찰부장을 겸임하게 했다. 그 권한은 군사경찰과 보통경찰의 직무 이외에도 첩보의 수집, 의병의 토벌, 범죄의 즉결에서부터 일본어 보급, 부업장려까지 광범위해 문자 그대로 헌병경찰은 조선인의 생사여탈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테라우치의 오른팔이자 실질적으로 식민 통치의 근간을 세운 초대 경무총감 아카시는 일본 근대사에서 특이한 위치를 가진 인물이었다. 아카시는 러일전쟁이 촉발된 후 유럽에서 러시아 배후를 교란할 목적으로 제정 러시아 반정부 세력을 규합, 러시아 정부를 공격하는 공작을 전담한 자였다. 일본 정부로부터 엄청난 재정 지원을 받아 러시아 내의 반정부 세력에게 무기를 대주며 실제로 레닌과도 회합을 했다고 한다. 그는 러시아 짜르 정권이 무너져야 사회주의 혁명에 유리하다며 레닌을 설득하였고 이에 공감한 레닌이 강력한 반전, 반짜르 투쟁을 벌이면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전쟁 후에 이토는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고의 공로자는 아카시였다며 그를 칭찬했다고 한다.

악명을 떨친 초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
악명을 떨친 초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

그런 경력을 가진 아카시가 경무총감이 되어 헌병보조원 제도를 모방한 순사보 제도를 만들었고 이들을 독립운동 탄압에 앞장세웠다. 한일병합 직전에는 일진회 등 친일단체를 만들어 한일병합을 건의하도록 배후조종하고 민족진영에 대해서는 회유와 협박으로 조직을 분열시키는 등 정치공작을 일삼았다. 과연 세계 스파이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공작의 달인다웠다.

조선에서 그는 의병장 허위를 직접 심문하고 살해하는 등 의병 탄압의 주역 역할을 했고, 특히 ‘기포성산(碁布星散·바둑판의 돌들과 하늘의 별처럼 헌병을 총총히 배치함)’이라는 혹독한 탄압방식으로 악명을 떨쳤다. 또한, 각 지방의 헌병대와 경찰관서에서 식민통치에 필요한 비밀정보를 수집하여 중앙본부에 보고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때 구축된 경찰정보체계는 그 후 일제 패망 때까지 식민통치에 가장 유용한 자료로 활용됐다.

헌병기구로는 서울에 조선헌병대사령부가 있었고, 그 아래 경성·대구·평양·함흥·나남에 헌병대를 두었다. 그 밑에 다시 본부, 분대, 분견소, 파견소, 출장소를 두었다. 전국의 헌병기관 수는 1910년에 653곳이었던 것이 아카시가 물러간 1914년에는 1,036곳으로 늘었다. 헌병대에서는 조선인을 보조원으로만 뽑았는데 보수와 대우가 좋아 지원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들이 바로 일제 헌병보다 더 악랄하게 동포들을 괴롭히던 ‘조선인 순사들’이었고 이후 친일 경찰의 뿌리가 된 자들이었다.

민인들의 고통은 어떠했던가. 가장 치욕적인 예로 태형을 들 수 있다. 보통 죄를 지은 이들 가운데 절반 정도가 태형을 선고받았는데 일제는 소의 생식기에 납으로 된 추를 달아 살 속을 파고들게 만들었다. 일단 맞으면 걸을 수조차 없었다. 태형은 민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무서운 형벌이었고 일제는 의기양양하게 ‘조선인과 명태는 맞아야 말을 듣는다’는 말을 퍼뜨렸다. 태형이 사라진 것은 무단 통치에 전민적으로 저항한 3.1항쟁 이후였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