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플랜·로컬푸드·통일농업 … 새 시대의 aT를 구상하다

[인터뷰] 이병호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

  • 입력 2019.04.01 00: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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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탈한 웃음과 나긋나긋한 목소리에서 특유의 여유가 묻어나왔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단호하고 막힘없는 말투에선 가슴 속에 간직한 굳은 신념과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이병호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사장이 지난달 19일로 취임 1주년을 맞았다. 농민운동으로 시작해 통일농업과 농산물 유통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새 정부 aT 수장의 적임자로 꼽혔다. 그 후 1년, 이 사장은 나름의 고민을 통해 지금까지의 aT와는 조금 다른 모습의 aT를 그려 나가고 있다. 급변하고 있는 농업 상황과 국내 정세에 발맞추고 있는 aT의 새로운 비전에 대해 이 사장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대담 심증식 편집국장·정리 권순창 기자·
사진 한승호 기자
 

본지 심증식 편집국장(왼쪽)과 대담중인 이병호 사장.
지난달 25일 서울 양재동 aT 집무실에서 본지 심증식 편집국장(왼쪽)과 이병호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이 대담하고 있다.

취임 1주년이 지났다. 우리나라 농식품 유통의 중심인 aT를 1년간 이끈 소회가 궁금하다.

aT는 지금도 농식품 분야에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1967년 설립 당시엔 직접 다양한 식품가공공장을 자회사로 두며 지금보다 훨씬 폭넓은 일을 수행했다. 그런데 지난 30~40년 동안 ‘공공은 무능하고 비효율적이다’, ‘시장은 유능하교 효율적이다’라는 이데올로기가 자리잡았고, 특히 UR이나 IMF 시기를 거치면서 그 역할이 대부분 민간에 넘겨졌다.

지금은 그게 과도해진 나머지 정말 중요하고 공공이 꼭 관리해야 할, 이를테면 식량자급률 같은 부분에도 도저히 손을 대기 어려워졌다. 시장주도화, 민간주도화의 흐름 속에 공공이 뭔가 할 수 있는 수단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그 수단을 다시 가져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정책수단과 자원, 재정과 권한을 잘 사용해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여러 가지 시장실패 사례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작은 개입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최대한 공공성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지난 1년간 aT를 경영하면서 가장 의미 있었던 점을 꼽는다면.

aT에 오고 나서 직원들과 농민단체, 전문가들을 망라한 혁신토론회를 하고 경영비전을 선포했다. aT가 우리 농업·농촌의 요구에 어떻게 부응할지를 모색하고, 또 그것을 조직 내에 잘 정리하고 체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핵심은 두 가지다. 여러 가지로 위협받고 있는 우리 농업·농촌의 ‘지속가능성’을 aT 사업 속에서 담보하는 것, 농업의 미래와 aT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혁신동력’을 마련하는 것이다. ‘지속가능성’과 ‘혁신성’이라는 두 가치를 조화시켜 나가자는 것이다. 이같은 비전을 만들어내고 직원들의 적극적인 동의와 의지를 이끌어낸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아주 특별한 조직개편이 눈길을 끌었다. 새로 설치한 ‘지속가능농식품전략추진단(추진단)’은 지금까지 aT의 조직이나 업무와는 다소 다른 성격을 띠는 것 같은데.

추진단은 혁신토론회에서 정립한 새 경영비전과 관련된 조직이다. 관성적인 업무경로를 기존 사업부서들이 스스로 바꾸기 힘들기 때문에 추진단이 사업부서들과 조력하고 안내하며 새로운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조직 내부에 국한되지 말고 공공급식·통일농업·사회적농업 등 각 분야에서 가장 전문적인 집단이나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할 것을 추진단에 주문하고 있다. 외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를 각 사업부서와 함께 aT의 사업으로 만들어가는 가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선 지금까지 추진단이 집중해온 건 푸드플랜이다. 새 정부 농정공약인 푸드플랜의 집행기관이 aT인데 사업부서들이 충분한 준비가 안돼 있어 그 대비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공공급식·로컬푸드, 남북 농업협력과 통일농업, 기타 혁신적인 사업들을 기획하며 앞으로 사업부서들을 도울 것이다.

 

지난달 25일 서울 양재동 aT 집무실에서 열린 인터뷰에서 이병호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은 농민들에게 “aT가 수입만 하는 게 아니라 수출도 많이 하고 로컬푸드·공공급식·지역농업 발전 등 다양한 부분에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관심 있게 지켜봐 달라”고 당부했다.
이병호 사장은 농민들에게 “aT가 수입만 하는 게 아니라 수출도 많이 하고 로컬푸드·공공급식·지역농업 발전 등 다양한 부분에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관심 있게 지켜봐 달라”고 당부했다.

푸드플랜은 새 정부 농정의 가장 큰 과제이자 흐름이다. 푸드플랜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여기에 어떻게 발 맞춰 나갈 생각인가.

근래에 세계 각국이 푸드플랜을 구축하고 있다. WTO체제 출범 이후 특히 식품과 농산물의 무역장벽이 없어지고 그러면서 대부분의 나라가 식품안정성 문제, 양극화와 지속가능성 등 비슷한 고민에 빠진 것 같다.

국가단위 푸드플랜의 주요 내용은 식품의 안정적인 조달이지만, 지역의 푸드플랜은 지역농업 보호와 지역 먹거리 순환체계 확보에 좀더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지역마다 학교급식과 로컬푸드를 중심으로 생태농업·지역경제 등 다양한 가치를 확산하려 하고 있다. aT는 현재의 eaT(학교급식전자조달시스템) 업무를 뛰어넘어 공공급식이 지역과 농업의 발전에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도록 고민하고 있다. 또, 로컬푸드와 관련해서도 다양한 정책사업을 수행하며 그동안 정책에서 배제됐던 영세농·가족농·귀농자·고령농이 지속적으로 지역사회를 지킬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평소 남북문제에 관심과 조예가 남달랐던 만큼 취임 이후 남북 농업협력 부분을 고민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때마침 무르익은 남북화합 분위기 속에 aT는 어떤 역할을 준비하고 있나.

하노이 북미회담이 결렬되기 전까진 회담 이후 빠른 시일 안에 남북 간에 농업부문에도 많은 일들이 진행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 상태론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아쉽다.

과거부터 농업계에서 ‘한반도공동농업계획’ 등 남북 농업협력에 대한 큰 구상이 있어 왔다. 이를 준비하기 위한 아주 낮은 단계에서부터 높은 단계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마다 공공이 해야 할 역할과 민간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 그런데 초기엔 민간보다 공공의 역할이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남북 경협사업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초기엔 사업방식의 차이와 정책적 제약 등 서로 잘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인 aT나 농어촌공사가 초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기반이 닦이고 서로 이해가 깊어진 뒤에 민간 자본이 들어가게 돼 있다. 때문에 다양한 사업에 대한 각오를 다잡고 있다.

지금까지는 대개 쌀·비료만 교류·협력이 이뤄졌지만 조금만 더 나가면 그보다 훨씬 많은 식량으로 확대할 수 있다. 이를테면 지금 우리가 양파와 무·배추를 쌓아놓고 돈 들여 폐기해야 하는 상황인데, 사실 이번 하노이 회담이 잘 됐다면 이 품목들은 무조건 바로 보낼 수 있겠다, 폐기는 안해도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aT는 농산물 국영무역을 담당하는 만큼 끊임없이 농민들의 원성을 듣는 기관이다. aT 사장으로서 농산물 수입은 피할 수 없는 업무인데, 수입에 대한 지론을 밝힌다면.

 

인터뷰중인 이병호 사장.
인터뷰중인 이병호 사장.

농산물 수입은 3개 카테고리로 나눠서 관리하고 있다. 첫째는 쌀이다. 쌀은 의무수입량을 어쩔 수 없이 수입해야 하는 만큼 효율성·경제성 등을 고려하면서 가장 좋은 쌀을 가장 싼 값에 사오려 하고 있다.

둘째는 참깨·녹두·율무처럼 절대량이 부족한 품목들이다. 귀농 증가 등으로 생산이 늘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 어쨌든 자급이 어렵기 때문에 이것도 수입선을 다변화하며 좋은 곡물을 싸게 사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셋째는 채소류인데 가능하면 적게 하려 한다. 100% aT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지난해엔 고추·마늘·양파 수입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편으론 aT가 수입하지 않는다 해서 수입이 안들어오는 게 아니다. 지금 양파 도매가격이 kg당 600원인데 800원짜리 중국양파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 크고 작업하기 좋은 중국산에 식당이 길들여져 있어 민간이 135% 관세를 내고서라도 들여오는 것이다.

이런 경우, aT는 50% 혹은 더 낮은 관세로 들여올 수 있는데 가령 aT가 500~600원짜리 수입양파를 풀면 민간의 과도한 수입을 막을 수 있다. 민간 수입업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수입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aT의 수입은 국내농업 보호와 물가안정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이 둘의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 지나치게 농업보호 쪽으로 갔다간 역으로 농업보호를 방해하는 결과가 날 수도 있다. 수입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한국농정> 농민 독자들께 전하고 싶은 말은.

aT를 농민은 생각하지 않고 수입이나 하면서 농민을 힘들게 하는 기관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더러 계신 것 같다. 하지만 aT는 사실 우리나라 농업과 농민과 농촌을 기반으로 한 기관이다. 우리 농업·농민·농촌이 뭔가 조금 더 나아지도록 하려는 관점을 갖고 노력하고 있으니 혹시 오해가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다. 수입만 하는 게 아니라 수출도 많이 하고 로컬푸드·공공급식·지역농업 발전 등 다양한 부분에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관심 있게 지켜봐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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