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정재룡 영감①

  • 입력 2019.03.18 09:19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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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능금(林檎). 옛 사람들은 왜 이 말에다 굳이 한자를 붙여 놓았을까. 능금! 이 말을 가만 입안에서 굴려보라.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능금 중에는 홍옥이 있었다. 홍옥(紅玉). 붉은색 강옥이란 뜻이다. 붉으면서도 신맛 덩어리인 홍옥이란 말만 들어도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문득 ‘홍옥가슴’ 그 가시내가 떠올라 콧등이 찡해진다). 홍옥 반대편 능금이라면 국광이었다. 별로 붉은색을 띄지 않아도 가을 된서리 서너 번만 맞으면 시원한 맛이 감로수 같았던 푸른 능금, 국광. 80년대에 자취를 감춰버린 국광은 그러나 청옥(靑玉)이란 이름을 얻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 능금나무 한그루면 논 한 마지기와 바꿔주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얼마나 오만한 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겠는가. 보리쌀 두어 되 들고 능금밭 집으로 썩은 능금과 맞바꾸러 갔던 소년들은 다 환갑을 넘겼거나 그 언저리쯤에 닿았을 것이다. 사납고 표독스런 셰퍼드가 한두 마리 있는 집, 탱자나무 울타리로 철옹성을 두른 곳, 그리고 무엇보다 그 집 자식들은 죄다 대학을 다녔는데 마을 친구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그건 일본사람들에게 배운 방식이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안하무인이면서 오만방자한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연륜이 있는 사람들 기억에서 사과라면 단연 ‘대구능금’으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그만큼 대구능금은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99년 미국선교사에 의해 이 땅에 들어온 이래 그 유명했던 대구능금 명성은 잉그리드 버그만 늙어 은막에서 사라지고 빛바랜 잡지 표지처럼 남아있을 때, ‘영천능금’이 단연 앙팡 테리블이었다. 그야말로 빛나던 시절이었다. 70년대부터 근대산업이 발전하면서 대구 근교 능금농사가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그 대신 영천에서는 재배면적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러나 영천에서 생산된 능금은 ‘영천능금’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대구능금’으로 팔려나갔다. 그만큼 대구능금이라는 명성이 유명했던 탓이었다. 지금은 재배지가 강원도 인제까지 올라갔지만 당시로선 북방한계선이 뚜렷했던 능금농사는 영천의 북쪽 경계선인 갑티재를 넘을 수 없었다고 한다. 1935년 11월 2일 <동아일보>에 능금에 관한 기사가 보이는데 현대어로 정리해서 요약하면 이렇다.

“전 조선에서 자랑하는 능금 생산지인 대구에서 도로 타지방의 능금을 역수입하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 원인을 들어보면 능금 생산자들인 경북과물조합에서는 금년 능금이 작년보다 흉작인 것을 구실로 근래에 드문 폭등을 보여 국광 한 상자(11킬로그램 조금 더 된다, 필자 주)에 3원 80전이다. 중간상인들은 그런 고가에 능금을 사서 소비자에게 판매할 수 없다고 멀리 황해도 황주 능금을 한 상자당 1원 50전에 사들였다. 운임 60전을 포함해 2원 10전으로 대구산보다 1원 70전이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한다.”

당시 대구 일원의 능금 생산자는 거의 대부분 일본사람들이어서 그 작자들이 대구가 능금 명산지인 걸 악용해 마음대로 가격을 담합하는 횡포를 부렸던 모양이다. 1930년 12월 18일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대구능금 9만여 상자가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제 나라 사람들에게야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능금이 일제강점기 민중들에게는 그리 인기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신문을 보면 1920년대까지만 해도 능금 먹기를 권유하는 기사가 눈에 자주 띈다. 능금을 빻고 가제에 싸서 짜는, 즙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고 운동선수에게 능금이 좋다는 기사가 자주 보이는 걸 보면 그 시절 능금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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