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샌프란시스코의 두 의사(義士)
[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샌프란시스코의 두 의사(義士)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9.03.10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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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제10회>

1908년 3월 23일 오전, 한 중년의 미국인이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배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 때 한 젊은이가 권총을 뽑아들고 그를 향해 쏘았다. 그러나 불발이었다. 분을 이기지 못한 청년이 그에게 달려들어 권총으로 마구 때리고 있을 때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한 발은 싸움 중인 청년의 어깨에, 두 발은 미국인을 관통하였다. 즉각 경찰이 출동하여 두 사람은 체포되었고 미국인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틀 만에 절명하였다. 이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은 하와이 이민 동포인 전명운과 장인환이었다.

두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지만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나타난 것이었다. 바로 조선 통감부의 외교 고문인 더램 스티븐스를 죽이고자 함이었다. 장인환 의사의 총을 맞고 죽은 스티븐스라는 자는 누구였던가. 스티븐스는 일본 외무성에서 다년간 근무한 미국인으로, 1904년 외교고문으로 부임한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를 합리화하기 위한 선전 활동을 전개하던 자였다. 뿐만 아니라 을사늑약 이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일본과의 여러 불평등 협약을 맺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 마디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에 국제적인 역할을 한 대표적인 친일 인사였다.

그런 그가 미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망언을 쏟아낸 것이 미국 동포들을 분노케 하였다. 인터뷰 요지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일본은 헐벗고 굶주려 사는 대한제국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일본은 조선에게 고마운 나라’라는 것이었다. 이에 각각 다른 동포 단체에 가입되어 있던 두 사람이 격분하여 그를 죽였고 재미동포 사회는 두 의사를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영어에 능통한 조선인을 찾아 나섰다. 미국 변호사와의 통역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은 영어를 잘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이승만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이 기독교인이고 살인자를 위한 일에 나설 수 없다며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듬해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도 부정적으로 보았던 그에게 동포 사회의 비난이 쏟아졌고 결국 통역은 역시 공부하러 와 있던 신흥우가 맡았다.

장인환 의사와 전명운 의사, 장인환 의사에게 저격당해 숨진 스티븐스(왼쪽부터).
장인환 의사와 전명운 의사, 장인환 의사에게 저격당해 숨진 스티븐스(왼쪽부터).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전명운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장인환은 2급 살인으로 25년 형을 받았다. 이 스티븐스 저격 사건은 국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주춤했던 의병들의 기세가 살아나 공세로 전환했고 소식을 들은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하려는 계획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두 의사의 운명은 기구하였다.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었던 전명운은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유럽을 돌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지방으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왔다.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이름을 바꾸고, 캘리포니아 주 여러 농장에서 힘겹게 노동을 하며 살았다. 아내가 일찍 죽고 이어 어린 아들마저 죽는 등 큰 고통을 받다가 해방 후 2년 만에 외롭게 세상을 떴다.

장인환은 더욱 비참했다. 일찍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그는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살다가 평양에서 청일전쟁을 직접 목격하고 기울어져가는 국가의 운명을 바로잡는 데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1904년 하와이로 이민, 사탕수수농장에서 2년간 일한 뒤,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막노동자로 일을 하였다.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조국의 주권이 침탈된 데 통분하여,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에 가입하여 독립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장인환은 재판 최후진술에서 동지들에게 ‘조국해방과 자유의 민주대한(民主大韓)을 건설하기 바란다’고 했으나 정작 자신은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했다. 십년 넘게 옥살이를 하고 가석방으로 풀려났으나 돌아온 조국에는 차디찬 감시와 일제의 탄압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할 수 없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그의 나이 쉰다섯이었다. 두 의사가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것은 이승만이 물러난 196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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