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 비가림을 하던 날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37

  • 입력 2008.06.15 11:03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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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었다 하자는 말 하기는 없다. 바람 일기 전에 다 마쳐야 되이 자, 빨리빨리!”

주인도 아닌 명환이가 밭에 들어서자마자 정신없이 재촉을 한다. 누구 하나 군소리 없이 팽글팽글 돌아간다. 명환이는 비닐 끝을 쥐고 가서 반대편에서 묶으면 주인과 신씨가 접힌 비닐을 펴 양쪽에서 집아 주면 나는 사다리 위에서 그 비닐을 당겨 쇠기둥에 묶어 놓고 3미터쯤 간격으로 세워놓은 비가림 철근에다 노끈이 들어 있는 비닐을 당겨 끼운다. 그러는 사이 밭주인과 명환이는 또 비닐을 끌고 가는 일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한다. 그러는 사이에 팔백 평짜리는 금방 끝이 났다. 트럭 적재함에 실려 다음 밭으로 가면서 명환이가 고래고함을 질러댄다.

“아이고, 배고파라. 이노무 바람은 와 안 부노.”

찬주네 이천육백 평 포도 비가림 비닐 씌우는 일을 바람이 불기 전 오전 중에 마치기 위해 아침 다섯 시 전에 나와 설쳤더니 일곱 지나가자 나도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한다. 포도밭 길이가 백 미터나 되어 비닐을 끌고 간 명환이가 저쪽 끝에서 쇠기둥에 묶는 일을 마치면 그 긴 비닐을 있는 힘 다해 당겨서 묶는 것이 내 몫이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대충 당겼다간 바람에 펄럭거리다가 찢어지고 만다. 무조건 팽팽하게 당겨야 후환이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비닐 양쪽에 들어 있는 노끈을 팽팽하게 당겨야 한다. 벌써 오른손 새끼손가락 둘째 마디에는 물집이 잡혀 쓰리다.

“주인 니 오늘 날 하나 멋지게 잡았다.”숨 돌린 틈 없이 재촉하여 팔백 평과 육백 평짜리 두 군데를 마치고 세 번째 밭에 와서 마지막 고랑을 하다말고 명환이는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이쯤에서 바람이 좀 불어도 좋으련만 공기는 마냥 고요하다. 그때서야 밭주인이 좀 쉬었다가 하자면서 물병을 들고 온다. 잠깐이지만 물은 달고 얼추 요기도 되는 것 같다.

다시 일을 하기 위해 일어서려는데 포도밭 안주인이 김밥과 함께 캔맥주를 가지고 왔다. 북문통 주공아파트 앞에서 샀다는 김치가 든 김밥은 맛이 썩 좋다. 저마다 받은 일회용 도시락과 캔맥주는 금세 동이 나도록 누구 하나 단무지는 젓가락도 대지 않는다.

“세현이 아부지는 소고기 데모하러 갖다 왔다메요? 고맙구마.”

포도밭 안주인이 커피를 건네주며 불쑥 그저께 밤의 대구 풍경을 떠올려준다. 그녀 집에는 옛날 말로 소코뚜레가 한 짐도 넘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한번 시큰둥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담배를 꺼내 무는데 명환이가 불쑥 물었다.

“암만케도 나는 명박이가 재협상을 안 하지 시푸다. 니는 우예 생각하노?”

“앉아서 생각한다.”

“지랄하네. 대구도 학생들이 마이 왔더나?”

“제법, 더러더러 보이더라, 와?”

“저 우에 누구 집 고등학생 하나는 이카더란다. 이히히, 글마 참 맹랑하데.”

명환이는 그렇게 운을 떼 놓고는 혼자 킬킬거리기만 할 뿐이다. 답답해진 포도밭 안주인이 조급증을 내고 신씨가 등짝을 두들겨 패자 명환이는 그제야 웃음을 거둔다.

“화룡동 박철식씨 있잖아. 그 집 큰 아가 대구 촛불집회에 갔다가 즈그 엄마한테 들켜 실컨 두드려 맞고는 이카더란다.”

“머라캤는데?”

“아빠가 일은 안 하고 맨날 놀기만 하이 내가 밭에 나가 일을 좀 한 거나 마찬가지 아이가. 그런데 머가 잘못됐노. 아, 이캤다는데 듣는 어마이 식겁을 묵고 억장이 탁 뭉개지더란다. 그런데 그 놈이 내 생질 아이가.”

“어머, 어머, 무신 놈의 종내기가 그따구 소리를 다 하꼬. 세상에도 차암…….”

포도밭 안주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혀를 내둘렀고 신씨가 맞장구를 친다.

“글마 그거 물건이네! 아이고, 거 참, 그기 크면 머가 될라꼬 그카노.”

‘갱상도’ 수구보수꼴통들의 낯짝을 죽 돌아보며 나는 쓰게 입맛을 다신다.

“마 됐다. 듣고 보이 말은 딱 맞는 말이네. 중기 맹쿠로 열심히 데모하러 댕기겠지 머.”

수구보수꼴통들이 주섬주섬 일어나자 나는 새로 캔맥주 하나를 딴다. 갑자기 술이 당긴다. 그리고 그 놈의 자식,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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