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9] 돌아오지 않은 밀사들

  • 입력 2019.03.03 19:30
  • 수정 2019.04.05 11:14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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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을사늑약으로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하였다. 이제 서울에 있던 모든 나라의 공사관은 철수하고 바야흐로 일본의 독무대가 되어 외교권과 입법, 사법, 군사지휘권까지 모두 이토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마치 봉건시대에 어린 왕을 대리첨정 하듯이 고종 위에 이토가 군림하게 된 것이었다. 다만 형식적으로 아직 식민지 수탈을 본격화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뒤늦게 사태가 심각함을 넘어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음을 안 고종은 저항을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국제여론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고종의 최후 저항이자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사건이 헤이그 밀사 파견이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1907년 6월부터 10월까지 장기간에 걸쳐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고종의 밀서를 품은 세 명의 밀사들은 두 달여의 긴 여행을 거쳐 마침내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출발한 이준과 러시아에서 합류한 이상설, 이위종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말이 밀사일 뿐, 그들의 행적은 이미 일제가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

두 번에 걸쳐 열린 만국평화회의는 이름과는 달리 전쟁에 관한 것들을 논의하는 회의였다. 그러니까, 선전포고는 어떻게 하며 포로는 어찌한다 등 전쟁기본법을 국제적으로 확립하고자 하는 게 목표였다. 그런 의미에서 고종의 밀사 파견은 애초부터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는 회의였다. 실제로 세 밀사는 회의장에 들어가는 것이 거부되었고 그 자리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을 통해 겨우 주장을 알릴 수 있었다. 당시 스물 세살이었던 이위종은 여러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기에 언론 인터뷰나 연설은 피가 뜨거운 약관의 청년이 주로 맡았다. 이위종은 국제기자클럽에서 프랑스어로 한 시간 동안 열변을 토해 많은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과 영국 등의 방해로 더 이상의 성과는 거둘 수 없었다. 그 어떤 나라 대표도 밀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밀사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왼쪽부터).
밀사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왼쪽부터).

한창 평화회의가 열리던 7월 18일, 이준의 죽음이 대한매일 호외판으로 알려진다. 내용은 분노에 찬 이준이 각국 사신이 모여 있던 회의장에서 할복하여 그들에게 피를 뿌리고 자결했다는 것이었다. 훗날 오보로 밝혀지긴 했지만 이 기사는 민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조선 독립을 호소하다가 자결하였다는 사실을 당시 민인들이 얼마나 애절하게 받아들였을지 지금의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민영환의 죽음보다 더 극적인 데다 나라에 대한 충성이라는 가장 큰 가치를 숭고하게 실현한 죽음으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이준은 보도가 나가기 나흘 전에 묵고 있던 호텔에서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검사이기도 했던 이준은 열렬한 애국지사였고 헤이그 밀사 파견 역시 그가 고종에게 건의하였다는 게 정설이다.

냉혹한 국제 사회의 외면과 끝내 임무에 실패했다는 절망에 이준은 말 그대로 기가 막혀 급서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두 명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뛰어난 학자이자 고위 관직을 거친 이상설은 을사늑약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헤이그 밀사로 합류한 경우였다. 그는 헤이그 이후에도 세계를 떠돌며 조선 독립을 역설하고 수많은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인 한흥동을 설치했고 이미 1910년에 망명 정부를 세우려 시도하였다. 러시아와 중국을 넘나들며 한시도 쉬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그 역시 끝내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1917년에 숨을 거두었다.

이위종은 주러 대사였던 이범진의 아들이었다. 한일병합 후 이범진이 자결한 후 그는 러시아 군에 입대하였고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혁명군에 가담하여 러시아 혁명을 위해 싸웠다. 이후 소련공산당원으로 활동하였다고 전해질 뿐 언제 사망했는지조차도 알려지지 않았다. 세 명의 밀사 모두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이준 열사만이 56년 후에 유해로 돌아와 서울 수유동에 묻혔다. 북한에서도 이준을 독립 영웅으로 소개하는 영화를 만들어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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