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영천포로수용소 그 사내③

  • 입력 2019.03.03 19:26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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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이중기 시인

휴전협상이 지리멸렬한 1952년 6월 29일 영천 제14포로수용소는 민간인 억류자 1,700명을 석방했다. 군복에 군화 신고 십만 원 어치 ‘물자공급표’를 주머니에 넣은 귀환자들이 밤 9시부터 새벽 4시 20분까지 출신지별로 출발했다. 전남으로 가는 열차가 가장 먼저 출발했고 마지막이 대구였다. 그러나 사내는 어느 열차에도 오르지 못했다. 가야 할 곳이 아예 없었다. 열차가 모두 떠난 뒤 정처 없는 사내의 행적을 졸시 「그 애송이」에서 가져오면 이러하다.

“억수장마 예고하는 가랑비가 목덜미 더듬을 때/영천역 광장 저만큼 한쪽 귀퉁이에/낯선 사내 하나 깨진 옹기처럼 앉아 있었다/민간인 ‘억류자’에서 ‘귀환자’가 되었으나/갈 곳 없었다/가야 할 곳 아예 없었다/정전회담 깐깐할수록 고지쟁탈전 치열했던/1952년 6월 30일 어슴새벽/평강여인숙 불빛이 깜박, 눈웃음치고 있었다/인민군 볼모에서 유엔군 볼모였다가/막 풀려난 그 청년/또 어떤 볼모가 될지 모를 아직은 애송이”(졸시 「그 애송이」 전문)

사내는 비에 쫓겨 그 새벽에 평강여인숙으로 스며들었다. 거기서 만난 여자와 아찔하게 몸 섞으며 서럽게 흐느꼈다. 화물열차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오래 여자가 사내를 안아주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사내는 여자 앞으로 십만 원짜리 물자공급표를 슬그머니 밀어놓았다. 장대비 소리가 서늘하게 등줄기위로 쏟아져 내렸다. 얼마나 시간 흘렀을까. 여자가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가 이윽한 후 김이 솟는 밥상을 들고 돌아왔다. 생전 처음 여자와 마주앉은 겸상이었다. 사내는 그게 불편하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밥숟갈을 들어 올리는 손이 자꾸 떨렸다. 보리밥은 거칠었고 완산배추 겉절이는 짜고 매웠다. 반 그릇도 못 비우고 밥상에서 물러나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더니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머, 몸이 많이 상했나 보네. 돼지고기라도 몇 근 끊어 오면 좋은데……점심에는 비린반찬이라도 좀 준비할 테니 한숨 푹 자 둬요. 처음으로 입을 연 여자의 말은 그랬을 것이리라.

밥상을 들어낸 뒤 방문에 짙은 커튼을 드리우며 여자가 말했으나 사내는 무슨 소린지 알아들지 못했다. 무엇보다 자리가 불편해 견딜 수 없었다. 마포 서강나루가 떠올라 내내 눈에 밟혔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포로수용소 철조망 너머로 익힌 영천 풍경이 싫지는 않았다.

며칠 후, 사내는 여인숙 주인 배려로 한 과수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한눈에 사내의 눈빛과 행동거지를 읽은 과수원 주인 인상이 싫지 않아 승낙해버렸다. 드문드문 평강여인숙 그 여자를 찾았다. 여자는 사내보다 다섯 살이 많아 품이 넓었다. 한 해가 지나 머슴살이로 들어앉은 과수원 동쪽 농막으로 여자 손을 잡아끌었다. 등 뒤의 캄캄한 날들은 활활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삼십 년이 흘렀다. 다섯 살이 많은 여자는 그러나 일곱 해만 살다가 격렬한 고통 속에서 떠났다고 했다. 그날, 사내는 처음으로 철원평야 들판 마을 골목쟁이를 더듬어보았다며 소주 한잔을 길게 들이켰다. 서울올림픽이 있었던 그해, 능금 수확이 끝난 겨울 초입이었다.

나 역시 그 사내와 헤어진 뒤 삼십 년을 흘려보냈다. 그 사이에 사내 이름조차 희미해지고 얼굴 생김새도 흩어져 아예 없다. 몇 해 전 나는 시집 『영천아리랑』을 준비하면서 오래 전에 써두었던 「그 사내」를 오래오래 들여다보았다. 서해바닷가 보령에서 흘러든 충청도 아줌마가 빼문 간특한 웃음 아래 앉아 육두문자 주정을 부리던 사내 얼굴은 그러나 도무지 떠올라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세상을 떠났으리라. 어디에 봉분이라도 남겨두기는 했을까. 그 사람 무덤이라도 있어 누가 알려주기만 한다면 소주 몇 병 사들고 달려가 한잔은 건네고 한잔은 마시면서 두런두런 얘기라도 길게 나누고 싶은 저녁답, 오늘은 영천에도 펄펄 눈 내리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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