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다시 시작하며

“봄이 한창 와버리면 늦을지도 모를 것들을 붙잡고
다시 시작해보자고 큰 마음 먹는 오늘이다.”

  • 입력 2019.03.03 18:00
  • 기자명 부석희(제주시 구좌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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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희(제주시 구좌읍)
부석희(제주시 구좌읍)

제주 농부의 한 해 농사 끝과 시작은 2월의 마지막에 몰려 있다. 한여름 50일 가뭄에 두세 번 파종했던 당근이 몸을 살찌우지 못한 채로 듬성듬성 남아 있지만 봄을 느꼈는지 잔뿌리가 수염처럼 나기 시작했다. 이젠 어쩔 수 없이라도 뽑아내야 한다. 겨울을 지낸 가을감자도 다시 싹이 나기 시작하니 한 해 감자 수확도 못한 처지에 가을에 심을 종자부터 심어놔야 하는 농부들은 이래저래 머리가 깨진다. 마음고생 돈고생이 어찌 올 한 해 뿐이었겠나. 그래도 농사지어서 먹고 살고 있지 않았던가.

친구가 며칠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며 꼭 같이 가야 된다고 해서 옆마을 낯선 사람들을 만났다. 1,000평쯤 되는 밭에 30평 봄감자를 심는 수상한 농부들. 괭이며 호미, 잘라낸 씨감자, 막걸리와 물병. 일이 힘든지 헉헉대며 인사를 한다. “농사 좀 가르쳐 주세요.”

장난처럼 일궈 놓은 아주 작은 텃밭에서 나는 엄청난 기술과 노하우를 펼쳐 나간다. 5분만에 감자심기 끝, 괭이 잡는 법부터 힘 덜 들이고 농사짓는 법, 40년 망한 농사에 노하우를 풀어내니 보리빵과 백년초 열매 주스에 이것저것 내오며 연신 고맙다고 허리를 굽힌다. 그 덕에 남은 1,000평 땅은 알아서 잘 갈아줄 테니 죽었다 맘먹고 농사 지어보라고 또 다시 쓸 데 없는 약속을 해버렸다. 이놈의 오지랖이란.

알고 보니 대학에서 명강의를 하는 교수님이고 이름난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란다. 그래, 뭐를 하든 시작할 때는 다들 모르지. 머리만으로는 꾼이 될 수 없지. 버텨내고 꾸준했던 시간들이 지나서야 몸이 기억하고 머리에 꽉 박혀 그게 입으로 나오면 해답이 된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뭐해?”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한 마디. “내일 당근 작업 준비는 다 하고 돌아다니냐?” 쓰잘 데 없이 돌아다니며 놀고만 있는 거 아니냐는 소리겠지. “걱정 마시라, 알아서 다 한다”고 큰소리를 쳐 본다.

다시 시작하며 내게 주어진 일들은 어떤 것일지, 지금부터 한 해를 어찌 지내야 잘 하는 건지 머리를 굴려 본다. 먼저는 내 밭에 있는 당근부터 잽싸게 없애버리자. 1,000평 밭갈이 약속도 후다닥 해버리자. 그러고는 뭐가 남아 있지?

바쁘다는 핑계로 주저했던 일들, 끝을 알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성산 제2공항’ 근처에 사는 사람 몫으로 뭐라도 해야 하는 게 있다. 찬성이든 반대든 사람들을 모아서 알려내고 얘기하는 일, 그거라도 하자. 예쁜 조그만 바닷가 마을에 거대한 풍력 바람개비가 세워지는 일에도 눈 감고 있을 수는 없다. 나무터널로 보기 좋은 길에 나무를 잘라내고 도로를 넓히는 일도 우리가 사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래, 뭐라도 해야 하는 것이지. 봄비가 촉촉이 오고 풀들이 좋아서 검은 땅을 덮으려 힘을 모은다. 어쩌면 후회가 많을지도 모를 일들. 봄이 한창 와버리면 늦을지도 모를 것들을 붙잡고 다시 시작해보자고 큰 마음 먹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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