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심정, 말로 표현 못할 정도”

[르포] 해남 배추 산지폐기 현장

  • 입력 2019.02.24 18:00
  • 수정 2019.02.24 21:42
  • 기자명 장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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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장수지 기자]

지난 18일 전남 해남군 산이면에서 배추밭을 갈아엎은 박명근씨가 트랙터에서 내려 침통한 표정으로 잘게 짓이겨진 배추를 바라보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18일 전남 해남군 산이면에서 배추밭을 갈아엎은 박명근씨가 트랙터에서 내려 침통한 표정으로 잘게 짓이겨진 배추를 바라보고 있다. 한승호 기자

 

가격 대폭락으로 월동배추 산지폐기가 한창이던 지난 18일 전남 해남군에선 트랙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달큰한 배추향이 맴돌았다. 농민들은 속이 알차게 들길 바라며 끈으로 일일이 동여맨 배추를 풀어 헤쳤고 트랙터를 몰아 밭으로 향했다. 겨우내 자식처럼 키운 배추가 기계에 스러지고 갈리는 동안 농민들은 수확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폭락한 가격과 요원한 정부 대책을 그저 원망할 따름이었다.

약 20년간 해남 산이면에서 배추를 재배중인 농민 박명근(51)씨는 이날 1,000평의 산지폐기를 진행했다.

박씨는 “막상 멀쩡한 배추를 폐기하려니 어처구니가 없고, 매년 농사를 지으면서도 가격 때문에 항상 이런 실정인 것 같아 안타깝다”며 “농산물 가격이 항상 들쑥날쑥한데 도대체 언제쯤 가격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전했다.

이어 “산지에선 농민들이 애써 키운 작물들을 폐기하고 있는데, 지금 바로 옆 식당에만 가 봐도 중국산 김치를 내어준다. 배추도 들여오고 김치도 들여오니 식당에서 수입산 김치만 소비되는 것이다. 이럴 때 정부가 수입 물량을 줄이고 국산 배추로 대체할 수 있게 대책을 마련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올해 월동배추 약 1만평을 재배한 문내면의 김화영(36)씨는 평년 대비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소비 부진까지 겹쳐 산지폐기를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김씨는 “지난해만 하더라도 전량을 수확·판매했는데 올해는 절반 정도가 남아있다. 이번 산지폐기에 480평 정도를 배정받았고 나머지는 가격이 좀 안정되면 수확·판매해볼 생각이었으나 농협에서 추가로 폐기 신청을 받는다고 하면 그거라도 해야 될 것 같다”면서 “배추 대신 다른 작물을 심으려고 해도 기후에 맞아야 되니까 바꾸기가 어렵고, 다른 작물 역시 가격이 유지된단 보장이 없는 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다”라고 꼬집었다.

현장 확인 차 방문한 문내농협 직원은 “폐기 신청 농가만 100여가구 정도다. 중앙에 35만평을 폐기 면적으로 신청했는데 배정된 건 5만5,000평이라 나머진 그냥 방치된 상태다. 때문에 지금 농가에선 40평이라도 할 수 있으면 폐기하려는 상황이다”라며 “가을부터 가격이 좋지 않아 공판장에 적체된 물량이 많았다고 한다. 거래가 안 될 정도로 가격이 형편없어 포전 계약을 한 유통 상인들은 중도금 지급도 못한 채 계약금을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고 지역 농협도 아주 곤란한 입장이다”라고 전했다.

날이 잔뜩 흐려진 오후, 다시 찾은 산이면에선 여전히 폐기가 진행 중이었다. 귀농을 고민하다 지난해 부모님이 계신 해남에 내려왔다는 이효정(42)씨는 올해 가격 폭락과 산지폐기를 경험하며 그저 속수무책인 농민들의 심정을 처음 느꼈다.

이씨는 “초부터 가격이 좋지 않아 포전 거래를 미루고 미루다 결국 수확도 못할 지경이 됐다. 잘 자라라고 물도 대주고 비료는 물론 사람 사서 묶어주는 작업까지 했는데 내 손으로 직접 갈아엎게 될 줄은 몰랐다”며 “몇 주 전 설 쇠러 서울에 올라갔더니 마트에서 알배추를 2,500원에 팔고 있었다. 산지에선 밭을 갈아엎고 있는데 소비지에서 판매되는 가격을 확인하니 만감이 교차했다”고 밝혔다.

덧붙여 “생산 과잉과 가격 폭락에도 정부에서 수입하는 물량은 고정돼 있어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들이 보고 있었는데 그걸 몰랐다”며 “도시에선 농민들이 무지해서 그렇다는 시선을 보내기도 하는데 사실 이런 경우 정부가 정부차원에서 선제적으로 대책을 마련하고 제때 실현하지 못해서 그런 영향이 큰 것 같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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