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8] 이날을 목 놓아 통곡한다

  • 입력 2019.02.24 18:00
  • 수정 2019.04.05 11:14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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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을사늑약 이듬해에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역사적인 평화회담을 성사시켰다는 것이 공로였다. 바로 포츠머스 회담이다. 1905년 9월에 뉴햄프셔의 해군기지에서 열린 미국, 러시아, 일본의 삼자회담에서 결정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러일전쟁 종전 회담을 중재하면서 미국은 승전국인 일본에게 각종 전리품을 챙기도록 했는데, 2조에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명시하였다. 미국의 언론들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평화협정이라고 선전한 그 평화의 희생자는 다름 아닌 조선이었다.

당사자인 조선은 알지도 못한 채, 그리고 일본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게 된 것이었다. 이 회담에서 결정된 조선의 식민지화에 대해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위상이 그토록 처참하였다. 하나의 나라라기보다는 국제 전쟁에 나와 있는 전리품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일본의 조선지배권을 인정한 포츠머스 회담 모습.
일본의 조선지배권을 인정한 포츠머스 회담 모습.

포츠머스 회담이야 당시 민인들이 알 수가 없었지만 이어진 을사늑약의 내막은 곧바로 알려졌다. 저 유명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황성신문의 논설을 통해서였다. 비교적 을사늑약의 내용을 상세하게 파악하였고 그에 도장을 찍은 반역 대신들을 통렬하게 질타하는 이 논설이 불러일으킨 공감과 분노는 대단했다. 야사에 의하면 분을 참지 못한 장지연이 술을 마시고 술김에 썼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읽는 이의 감정을 격동시키고 분통하게 만드는 문장들이다. 이 논설에서 대신들을 일컬은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라는 욕은 이후에 최악의 욕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논설로 황성신문은 정간을 당했고 장지연 역시 투옥되었다. 장지연은 일급의 문사였다. 이 논설 이전에도 여러 명문들을 썼고 독립협회에서 총무를 맡는 등 다재다능을 자랑했다. 하지만 가슴 뛰는 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장지연은 훗날 안타깝게도 친일 성향의 글을 다수 발표한다. 그가 사장으로 있던 경남일보는 일왕의 생일에 맞춰 찬양 기사를 내기도 했다. 나약하고 일그러진 지식인의 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역사 속에서 너무나 자주 보게 될 먹물들의 변절이기도 했다.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한 민영환.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한 민영환.

나라가 망하면서 조선의 민인들에게 최고의 영웅으로 떠오른 사람은 단연 민영환이었다. 고종의 경호실장 역할을 하던 민영환은 을사늑약 이후 그 부당함을 몇 차례 상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칼로 배를 가르고 목을 찔러 절명하니 그의 나이 마흔넷이었다. 사실 그는 민씨 척족으로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사람이었다. 불과 스무 살에 당상관에 이를 정도였고 핵심 권력 4인방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나름대로 개혁적인 지향을 가진 지식인이었고 유서에 쓰인 대로 국가에 대한 유교적인 충성심이 확고하였다.

민영환의 죽음이 던진 파장은 엄청났다. 장안의 온 백성이 그의 집으로 몰려가 호곡하고 종로에 모인 사람들은 자발적인 집회를 열었다. 집회에서 연사로 나선 이상설은 열변을 토하고 땅바닥에 머리를 짓찧어 기절하여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당대 권문세가 출신이 자결하면서 전국에서 연쇄 자결 사태가 이어졌다. 민영환의 부인도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고 그의 인력거를 끌던 이도 나무에 목을 매었다. 조병세와 이명재, 이상철, 송병선 등의 관료 출신들과 지역의 유생들이 음독하여 목숨을 끊었다. 자결 정국이라고나 해야 할까. 나라를 잃은 원통함과 부끄러움이 빚어낸 죽음들이었다.

민영환이 죽고 불과 며칠 후에 그의 피가 뿌려진 방바닥에서 놀랍게도 대나무 한 그루가 자라기 시작했다. 죽어도 죽는 게 아니라던 유서의 구절과 맞물려 이 신비로운 대나무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피 속에서 자랐다하여 혈죽이라 불렸다. 혈죽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렸고 어느 신문에서는 한 면 전체를 이 대나무 그림으로 채우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몰리자 일제가 바닥을 뜯고 대나무를 뽑아버렸는데 다행히 보관한 이가 있어 지금까지 전해온다 한다. 나라가 망해 통곡 소리 애달픈 가운데 씩씩하게 떨치고 왜적을 물리치려는 이들 또한 죽순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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