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7] 그 해, 을사년

  • 입력 2019.02.15 14:44
  • 수정 2019.04.05 11:14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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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1905년, 을사년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떨어진 해다. 지금은 을사늑약이라는 명칭으로 널리 불리지만 그 또한 역사적으로 확립된 용어는 아니다. 이전에는 보통 을사조약, 을사5조약, 심지어 을사보호조약이라고도 불렀다. 늑약이라는 단어가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라는 뜻이므로 가장 근접하다고 여겨지지만 일부 학자들은 조약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으므로 그 또한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을사년에 맺어진 이 망국 조약에 대해 원인 무효를 주장하는 측과 이미 이후 사십 년 동안 식민지를 겪은 터에 그 같은 논의가 부질없다는 측이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의견을 지지하는 편이지만, 백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이런 논란이 이는 것은 을사년의 아픔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일제는 수십 년 동안 집요하게 추구해오던 조선 지배의 꿈을 결정적으로 이루게 되었다. 감히 넘볼 수 없었던 청나라와 러시아를 전쟁으로 제압하고 열강의 암묵적 동의하에 얻은 결과였다. 그 과정에서 우리 내부는 어떻게 대응했던가. 아니, 어떻게 호응했는가를 알아보는 게 그 해를 되돌아보는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성찰일 것이다.

송병준과 이용구.
송병준과 이용구.

일제는 식민지배 전략에 대해 이미 많은 준비를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조선 민인들의 반대가 극심할 것을 예상하고 마치 조선인들이 일본의 지배를 원한다는 형식을 띠고자 했다. 여기에 동원된 것이 소위 1세대 친일파라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 첫머리에 오를 사람이 이완용과 더불어 양대 민족반역자로 꼽을 송병준이었다. 무관 출신이었던 그는 애초에 김옥균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자객이었으나 오히려 김옥균에게 감화되어 개화파가 된 자였다. 오랫동안 일본에서 살며 노다라는 일본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첫 번째 조선인이기도 했다. 러일전쟁 시 일제의 통역관으로 들어온 그는 친일파를 넘어서 일제 밀정이라 불러야 할 자였다. 그는 일제의 사주를 받아 친일주구 단체인 유신회를 조직했다가 다시 이용구, 손병희 등의 세력과 손잡고 그 유명한 친일단체 ‘일진회’를 발족시켰다.

이용구 또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친일파였는데 그 역시 갑오농민혁명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운 바 있던 인물이었다.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수만 명의 교도를 이끌던 그가 결국 친일파로 전락하고, 일제강점기에서 승승장구하면서 동학혁명을 신원하는데 앞장섰다는 사실 또한 기막힌 역사의 아이러니다. 하여튼 송병준과 이용구는 일진회를 앞세워 일제의 조선 지배를 선동했다. 겉으로 내세운 바는 동양의 평화니, 새로운 생활의 개선이니 했지만 속셈은 일제의 지배였다. 일진회는 당시 무려 백만 명의 회원을 가진 조직으로서 그 영향력이 엄청났다. 실제로 그들은 러일전쟁에서 조직적으로 일본군을 지원했으며 막 건설되던 경부선 철도나 각종 부역에 동원되었다.

을사오적. 권중현, 박재순,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을사오적. 권중현, 박재순,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이런 민간의 친일파가 판을 깔았다면 결국 늑약서에 마지막 도장을 찍은 자들은 잘 알려졌다시피 조정을 책임진 대신들과 그 우두머리인 고종이었다. 흔히 을사오적이라고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여덟 대신 중 한규설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혐의가 오십보백보다. 그래서 을사칠적이라 부르는 학자들도 있는데, 어떤 명칭이든 고종을 빼는 것은 올바른 역사 인식이 아니다. 국권을 넘기는데 왕이 앞장섰다는 사실을 밝히는 게 부끄러운 정서가 분명 있겠지만, 이미 근왕시대를 지난 지 얼마인데 요즘 젊은이들이 그런 정서를 이해할 리 없다. 고종은 민비가 죽고 난 이후 일본인들에 대한 공포가 극심하였다. 조약을 강요하는 이토히로부미가 무서워 그 자리에 있는 것조차 싫어서 피해버렸다. 오백년 종묘사직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그가 남긴 말은 ‘대신들이 알아서 처결하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봉건시대에 제 나라를 넘기는 일을 신하들에게 알아서 하라는 군주도 있단 말인가.

물론 이후의 경과를 보면 그 무서운 자리를 피하고 난 후, 자신의 ‘외교정치력’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 또한 국제정세에 어둡고 자신의 민인보다 타국의 힘에 의지하려 했던 무능을 보여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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