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영천포로수용소 그 사내②

  • 입력 2019.02.15 14:40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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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우리 앞 세대는 일제강점기에 이어 해방정국 미군정과 한민당이 주도한 정책 실패 때문에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하는 처지를 살아냈다. 해방 그해에는 엄청난 풍년이어서 미군정의 묵인 아래 오백만 섬 이상이 일본으로 밀수출하는 바람에 국내에선 쌀이 모자랐다. 그것은 결국 미군정이 일본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한국인들은 굶주리게 했다는 사실이었다. 아사 직전 민중들의 거대한 분출구가 바로 대구 10월 항쟁이었다. 이 항쟁은 걷잡을 수 없이 38선 남쪽 전역으로 번져갔지만 이내 진압되었고 이 과정에서 야산대가 만들어진다. 이승만 정권의 10월 항쟁에 대한 치졸한 보복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리 앞 세대였다. 한국전쟁 전후로 보도연맹을 가장해 전국에 걸쳐 이루어진 무고한 양민학살과 기나긴 독재정권으로 인해 은산철벽(銀山鐵壁)이 되어버린 이념 앞에서 민중들은 귀머거리면서 장님이었고 벙어리 노릇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여 년 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영천유족회’ 결성 당시 그들은 말했다.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는데 무엇을 말할 수 있었겠느냐고. 무엇보다 습관이 되어버린 자기검열에 의한 묵비, 자기부정의 그 지독한 묵비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토록 오랜 세월이나 입을 봉한 채 벙어리로 살아가는 게 가능했다는 사실 앞에 나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날 때마다 사내는 내게 아찔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승만이 민간인포로수용소를 방문했던 이야기, 영천포로수용소 폭동이야기, 거제도에 있던 반공포로들이 영천 민간인포로수용소로 옮겨온 이야기를 들어야하는 시간은 그러나 너무 짧았다. 급하게 술을 마시는 그가 소주 두 병쯤 비울 동안만 내게 허용된 시간이었고 그 다음에는 취해서 거칠어졌기 때문에 육두문자와 함께 횡설수설이었다. 그런 그의 술버릇은 주인여자로선 한 푼이 아쉬워 차마 내치지 못한 애물단지였기에 늘 등 뒤에서 경멸스런 조소를 물고 있도록 했다.

기록해두었던 메모장은 서재와 함께 불타 없어졌기에 삼십 년 저쪽 기억은 흐릿하다. 일제강점기 어느 시기에 핏덩이인 채로 어미로부터 버림받은 그의 출생에서부터 영천포로수용소까지의 기나긴 과정을 압축해서 말하기란 결코 간단치가 않다. 빛나는 젊은 시절 한가운데를 관통해가면서 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이념전쟁의 피해자였기에 역설적이게도 당연히 그는 신군부 세력 지지자였고 민주주의는 나라를 병들게 한다는 박정희에 대한 맹신을 가지고 있었다. 졸시「그 사내」한 부분에 기대 철원에서 영천까지의 도정을 압축하면 이런 것이다.

“사생아였다/몸 추스르자 몰래 떠난 어미는 뻐꾸기였다/골목에 쓰러진 만삭 여자 거두었다가/거대한 짐 떠맡은 늙은이가 조부인 줄 알고 따랐던/그는 식민지 철원평야 통 기억하지 못했다/열두 살,/해방 서울역에서 늙은이 손 놓아버리고/닭울녘에 쓰러져 잠든 곳이 마포 서강나루였다/거기서 잔심부름하다 장골이가 다 되었는데/남진하는 인민군에게 붙들려 보급품 나르다가 체포,/사흘거리로 비행기가 디디티가루 뿌려주는/영천포로수용소에 갇혀버렸다”

그렇다고 사내가 철원에서 영천까지 오게 된 긴 도정을 어느 한 자리에서 일목요연하게 털어놓았던 건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술자리 이야기는 기승전결이나 육하원칙을 아예 무시해서 두서가 없었다. 이쪽 이야기를 하다말고 저쪽 이야기 한 토막을 갖다 붙이기도 했다. 이야기 줄거리를 맞추기 위해 나는 수없이 되물어야 했고 그때마다 그는 조금 시큰둥하게 나달나달 헤진 옛날을 더듬어 꺼내보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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