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고 싶다’던 70년 소망, 마침내 꽃피다

  • 입력 2019.02.17 18:00
  • 수정 2019.02.19 11:03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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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들이 있다. 남들이 ‘인생의 황혼기’라고 함부로 재단하는 그 나이대에, 할머니들은 배움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할머니들은 왜 지금 한글을 배우게 됐는가. 그리고 배우면서 어떤 보람을 느낄까. 경남 거창군과 경북 칠곡군에서 문해학교를 다니는 할머니들을 만났다.

지난 12일 경남 거창군 웅양면의 자택에서 만난 유학임 할머니가 인터뷰 도중 지난달에 받은 문해학교 수료증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12일 경남 거창군 웅양면의 자택에서 만난 유학임 할머니가 인터뷰 도중 지난달에 받은 문해학교 수료증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한승호 기자

글 배워 손주한테 문자 보내는 보람

경남 거창군 웅양면에 사는 유학임 할머니(77). 그는 지난달 14일 생애 처음으로 상장을 받았다. 거창 하성단노을 생활문화센터의 문해학교 수업과정을 마친 데 따른 수료증이었다.

“동네 사람들 다 모였는데 그 앞에서 수료증이라 캐가 단상에 나가서 받았는데 부끄러웠다 카이. 내사마 그 많은 사람들 앞에 서 본 적도 없었고.”

유 할머니는 국민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그는 일곱 남매 중 첫째였다. 국민학교 1학년 이후의 어린 시절은 여섯 동생들 뒷바라지에 바쳤다. 어머니 농사일도 도와야 했기에 공부할 틈이 없었다. 그러다 18세 때 시집갔다.

이후엔 자식 넷을 낳았다. 그때부터 온전히 자식들 뒷바라지하며 살았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자식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갔다. 식당 일도 하고, 식품공장에서 무거운 짐 옮기는 일도 하는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부산 가가 어찌 살았는지 몰라. 옛날엔 은행 가서 돈 찾거나 입금할 때도 내 이름을 써야 했는데 그걸 몬 해가 어려웠는기라. 그래서 은행 직원한데 ‘이름 좀 써줄 수 있을까요’라 묻기도 마이 물었다. 그러면 어떤 직원은 ‘그것도 몬 쓰냐’ 카며 뭐라카기도 했었다. 그나마 국민학교 때 숫자 배운 기는 기억나 차 남바 읽고 차는 제대로 타고 다녔는기라.”

자식들이 독립한 뒤 유 할머니는 2014년 웅양면으로 돌아와 텃밭에서 농사지으며 지냈다. 그러다 2015년부터 문해학교를 다녔다.

“선생님이 내한테 하나 가르치믄 둘을 안다꼬 칭찬하드라꼬. 얼라들맹키로 을매나 기뻐했는지 몰라. 같이 수업 듣는 할매들 중엔 농사일하느라 바빠 몬 오는 할매들이 많은기라. 내는 그래도 텃밭에서 쪼매나게 농사지으니 수업도 더 열심히 들었데이.”

물론 적지 않은 나이에 한글을 새로 배우는 건 어려웠다. 유 할머니는 특히 “‘닭’ 같은 글자의 한글 받침 쓰는 기랑 ‘ㅐ’, ‘ㅔ’ 요 글자들을 어데다 써야는지 지금도 헷갈린다”고 토로했다.

그래도 유 할머니는 이제 어엿하게 ‘유학임’이란 이름 석 자도 쓸 수 있고,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문자를 보낼 수 있어 기쁘고 뿌듯하다고 말했다. “자식들도 내한테 ‘엄마 자랑스럽다’ 카고, 손주들이 보내는 문자도 읽을 수 있는 게 참으로 좋은기라.” 수료증을 보여주며 웃는 유 할머니의 표정이 환했다.

‘사랑이라카이 / 부끄럽따 / 내 사랑도 / 모르고 사라따 / 절을 때는 쪼매 사랑해조대 / 그래도 뽀뽀는 안해밧다’(박월선 할머니의 시 ‘사랑’) 한평생 농사짓던 할머니들이 늘 갈망하던 한글을 배웠다. 인생이 담긴 시를 썼다. 이 할머니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칠곡가시나들’도 곧 개봉을 앞두고 있다. 지난 12일 경북 칠곡군 약목면 마을회관에 모인 할머니들이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리며 밝게 웃고 있다. 왼쪽부터 김미자(80), 곽두조(88), 김두선(86), 이원순(82), 강금연(85), 안윤선(83), 박월선(89) 할머니. 한승호 기자
‘사랑이라카이 / 부끄럽따 / 내 사랑도 / 모르고 사라따 / 절을 때는 쪼매 사랑해조대 / 그래도 뽀뽀는 안해밧다’(박월선 할머니의 시 ‘사랑’) 한평생 농사짓던 할머니들이 늘 갈망하던 한글을 배웠다. 인생이 담긴 시를 썼다. 이 할머니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칠곡가시나들’도 곧 개봉을 앞두고 있다. 지난 12일 경북 칠곡군 약목면 마을회관에 모인 할머니들이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리며 밝게 웃고 있다. 왼쪽부터 김미자(80), 곽두조(88), 김두선(86), 이원순(82), 강금연(85), 안윤선(83), 박월선(89) 할머니. 한승호 기자

‘8학년 6반’ 할머니들의 행복

86세. 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2리 ‘늘배움학교’ 학생들의 평균 연령이다. 늘배움학교는 칠곡군 ‘인문학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문해학교다.

‘8학년 6반 교실’은 복성2리 마을회관에 있다. 경로당 안에선 할머니들이 감귤을 까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교실 벽엔 할머니들이 문해수업 때 쓴 시들이 걸려 있었다.

할머니들은 2015년부터 문해수업을 받았다. 한글을 배우는 건 쉽지 않았다. 박월선 할머니(89)는 “열심히 배왔는데도 나이가 들어가 머리에서 잘 기억을 몬한다”라면서도 “이름 석 자라도 쓸 수 있게 돼 가 다행 아이가”라며 웃었다. 강금연 할머니(85) 또한 “수업 마치고 돌아서믄 잊아뿌고, 또 며칠 뒤 수업에서 다시 배와도 나오믄 또 잊아뿐다. 그래도 마 계속 배우는기다”라 했다.

늘배움학교 교사 주석희씨는 4년 동안 할머니들과 동고동락해 왔다. 주씨는 “수업 시작하고 나선 서로 며칠 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눈다. 그 다음에 1시간 한글수업을 진행한다”며 “교재를 통한 수업 외 나머지 시간은 노래도 하고 오락도 즐기고 그림도 그리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고 말했다.

에피소드도 많다. 김두선 할머니(86)는 “주선생 온다 카믄 먼저 모야 있던 할매들끼리 ‘문 잠가뿌라’며 문 잠그고 아무도 없는 척 하는 짓궂은 장난도 마이 치삤다”고 했다. 수업 때마다 소주와 요구르트를 섞은 ‘쏘요’를 갖고 와 먹는다. 장난기 가득하고 간식 먹으며 수다 떠는 모습들. 영락없이 어린 학생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할머니들은 절실했다. 수업마다 어느 할머니 하나 지각하지 않았다. 수업 1시간 전 마을회관에 도착해서 예습했다. 70여년전 일제강점기 당시 학생이던 할머니들은 한글을 배우지 못하고 오직 일본어만 배워야 했다. 해방되자마자 일본인 교직원들은 책을 모조리 빼앗아 달아났다.

해방되고도 할머니들은 한글을 배울 수 없었다. 곽두조 할머니(88)는 “집안 어른들은 ‘가시나가 글 배워 가 뭐하노. 얼른 시집 가 일이나 하모 살믄 되지’라며 얼른 시집 가라꼬 한기라. 내도 그래서 16세에 시집 가 가 아 넷 낳아 공무원으로 열심히 키웠데이”라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다른 할머니들도 16~18세의 어린 나이에 시집갔다.

곽 할머니는 글을 배우고 싶던 소망도, 가수가 되고 싶던 꿈도 70년 가까이 속으로만 간직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 글을 배우는 순간이 소중하다. 최근엔 생애 처음으로 노래자랑대회에 나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고 싶던 꿈을 작게나마 실현했다. 곽 할머니의 노래자랑대회 출전 이야기는 영화「칠곡 가시나들」에서도 나온다.

주석희씨는 “할머니들의 배움에 대한 욕구는 워낙 커서, 글을 배울 때 젊은 친구들보다 훨씬 애살 있게 배웠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이 컸고, ‘내가 교사로서 정말 중요한 일을 하는구나’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특히 ‘문대고 칠갑하는 것’을 좋아하는 박월선 할머니는 글을 배운 뒤 그림일기도 썼다. 박 할머니는 그 동안 배우고 썼던 글씨와 수업시간에 그렸던 그림들을 바늘로 기워 모았다. 수업 때 썼던 걸 하나라도 잃어버릴까봐, 계속 보고 싶어서 바늘로 기웠다고 했다. 박 할머니는 주씨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해 주씨를 눈물짓게도 했다. 초상화 제목은 ‘우리 선생님’이었다.

김두선 할머니가 말했다. “공부가 재미난 것보다 선생이 좋아서, 같이 하는 할매들이 좋아서 열심히 학교 다니는 기야.” 경북 칠곡군 약목면의 8학년 6반 할머니들은 함께 글 배우고 우정을 쌓으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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