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6] 제국의 발톱

  • 입력 2019.02.03 18:00
  • 수정 2019.04.05 11:14
  • 기자명 한국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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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최용탁 소설가

우리 역사에서 38선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뜻밖에도 1902년 무렵이다. 일본이 러시아에게 한반도를 반으로 나누어 지배하자며 제시한 선이 38선이었던 것이다. 러시아가 39도 선을 제시하여 협상은 깨졌다. 그러니까 일제에서 해방된 직후 38선이 생겨나기 40여 년 전에 이미 우리나라를 두고 분단 시도가 있었고 그 이면에는 조선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치열한 계산이 있었다. 소위 지정학이라는 우리의 숙명이 제국주의 광풍 속에 애처롭게 휘둘리게 된 것이었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을 등에 업었고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 두 세력이 부딪친 게 1904년의 러일전쟁이었다.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으며 조선과 인도를 서로 먹기로 했으며 역시 일본과 미국은 그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조약으로 조선과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주고받았다. 동맹이니 조약이니 하는 것들은 그저 제국주의자들이 남의 나라를 가지고 농락한 것일 뿐 구역을 나누어 이권을 뜯어가는 조폭의 행태와 다를 게 없었다. 그 과정이 평화롭게 진행되면 조약이나 동맹이 되고 저희들끼리 수틀리면 전쟁이 되는 것이다 수천만의 민인들이 죽어간 양차 대전이 그것 아니었던가.

하여튼, 애초에 일본은 러시아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으로 여겨졌지만 선전포고 전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며 기선을 잡았다. 첫 전투가 바로 인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이었다. 러시아 함선 바라크호와 카레예츠호는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에 수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자폭하여 침몰한다. 적에게 배를 넘겨주지 않으려는 선택이었다. 러시아 해군의 영웅적인 패배와 자폭은 이후 러시아에서 대대적인 충성심의 상징이 되었다. 백년의 시간이 흐른 후 인천시는 소장하고 있던 바라크호의 깃발을 러시아에 내어주었고 이로 인해 인천은 러시아와 각별한 관계를 가진 도시가 되었다.

인천 앞바다에서 침몰한 러시아 전함 바라크호.
인천 앞바다에서 침몰한 러시아 전함 바라크호.

전쟁은 예상과 다르게 전개되었다. 병력이나 군비에서 월등하였고 무적함대라 불린 발틱함대를 가진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하는 믿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일본이 비로소 세계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는 전기이기도 했다. 러일전쟁 승리는 일본으로서는 그야말로 역사상 최고의 승리였다. 러일전쟁은 두 나라가 싸우면서 전장은 중국과 조선인 기묘한 전쟁이었다. 여순과 봉천, 조선의 서해와 남해에서 맞붙은 두 나라 사이에서 조선 민인은 크나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인천항에서 포격전이 벌어져 장안의 백성들이 피난을 갔고 궁궐조차 텅 비었다. 관료들이 앞 다투어 도망을 치고 이를 본 서양의 종군기자들이 보도하여 세계적인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외교력도 군사력도 없는 무능한 봉건왕조가 보여준 한심한 사태였다.

훈장을 달고 있는 고종의 모습.
훈장을 달고 있는 고종의 모습.

조선의 백성 또한 전쟁 속에 휩쓸렸다. 군수품 운반에 동원된 이들은 노예처럼 얼굴에 각각 다른 색깔을 칠하고 색깔 별로 구분된 물품을 날랐다고 한다. 또한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별하기 어려웠던 러시아가 상투의 유무로 판단하여 상투가 없는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오인하여 즉결 처단하는 일도 숱하게 벌어졌다. 제국주의의 광풍에 죄 없는 민인들만 죽어나간 것이었다. 전쟁의 결과 또한 기묘했는데 승전국 일본은 중국 땅인 대련과 봉천, 그리고 을사늑약으로 조선 땅을 전리품으로 챙겼으니 제국주의자들이 벌이는 전쟁의 본질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태였다.

전쟁 초기에 고종은 일본군에게 거액의 기부금을 전달했다. 전쟁 비용에 보태라는 뜻이었다. 이에 크게 기뻐한 일왕 메이지는 고종에게 훈장을 수여하겠다며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한다. 도하 신문에서 이토의 방한을 환영하는 기사를 내고 동양 삼국이 협력해야 한다며 수선을 떨었지만 일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고종이 돈을 내고 일본의 대신에게 훈장을 수여받는 장면은 또 하나의 치욕이었다.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동학을 장악한 손병희가 ‘일한동맹론’을 내세워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인 1만원을 일본군에 바친 사실도 씁쓸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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