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적십자회비와 이장의 용기

  • 입력 2019.01.27 18:00
  • 기자명 이영수(경북 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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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수(경북 영천)
이영수(경북 영천)

연말이 되면 이장회의에 빠지지 않는 안건이 있다. 적십자회비와 불우이웃돕기에 마을별로 적극 협조해 달라는 것이다. 사실 말이 좋아 협조이지 강제성이 농후하고 서류에도 분명 ‘협조’가 아니라 ‘분담금’으로 명시되어 있다.

120여호가 사는 우리 동네에서는 지난 연말 적십자회비로 33만원, 불우이웃돕기로 30만원, 총 66만원을 ‘분담’했다. 담당공무원에게 뭐 이렇게 많으냐는 소심한 항의를 하니 그래도 작년보다 3만원 줄였다며 웃었다.

좋은 일에 썼다고 생각하면 홀가분할 테지만 그래도 ‘구호’와 ‘지원’을 누구보다 먼저 받아야 할 어르신들만 사는 시골 촌동네에서 ‘구호’와 ‘지원’의 명목으로 1년에 수십만원씩 강제적으로 각출한다고 생각하면 불쾌하기 짝이 없다.

처음 이장이 되고 적십자회비가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도 모르고 마을마다 반강제적으로 분담한다는 게 납득이 안 돼서 면사무소 담당직원에게 적십자회비를 꼭 내야 되는지 조심스레 물어본 적이 있었다. “강제성은 없지만 웬만하면 좀 내 주십시오”라는 부탁에 더는 이야기를 못했다.

다행히 우리 동네는 골프장반대 투쟁을 하면서 마을기금을 마련해 놓은 것이 있어 형편이 괜찮은 편이지만 마을 돈이 없는 동네 이장들은 불우이웃돕기와 적십자회비를 한꺼번에 내는 연말이 곤혹스럽다.

이장회의 때마다 납부 협조 요청을 하니 육성회비 안냈다고 담임선생님한테 불려나가던 쌍팔년 시절 같다. 지난해 이장회의 때 “적십자회비가 도대체 어디 쓰이는지도 모르겠고 또 내고 싶어도 마을 돈이 없어서 못 준다”고 하던 신임 이장님이 계셨는데 올해는 어떻게 하셨는지 물어보니 “하도 시달려서 내 돈 주고 해결했다”며 씁쓸해 하셨다.

용기 있게 ‘분담금’의 부당성을 지적하셨던 신임이장님 편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올해는 용기를 내어 이장회의 때 손을 번쩍 들고 질의했다.

적십자회비와 불우이웃돕기 분담금이 사실 만만치 않은데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도 모르겠고, 사실 구호와 불우이웃돕기를 먼저 지원받아야 할 시골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반강제적으로 모금하는 게 맞는 일인지, 또 힘없고 귀 어두운 촌사람들한테만 이렇게 걷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데 혹시 서울 강남 사는 사람들도 우리처럼 통별로 분담금을 걷고 있는지 물었다. 면장님은 강제성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면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이 관내 불우한 주민들에게 지정기탁이 되는 방법을 알아보겠다는 중재안으로 일단락 됐다.

이장회의가 있은 며칠 후 언론에서 적십자회비 지로용지의 부당성이 대대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그나마 도시에는 지로용지가 집집마다 배달되어 주민들이 선택이라도 할 수 있지만, 농촌에는 마을별 이장공문함에 마을주민들의 지로용지가 통째로 들어있어 선택의 책임은 오롯이 이장에게 있다.

사실 농촌지역에서 관행처럼 이어지는 적십자회비와 불우이웃돕기의 마을별 분담금 모금은 부당하고 사라져야 마땅하다. 말은 안 해도 담당공무원들도 이장들과 같은 심정이라 짐작된다. 다만 오래된 관행을 지적하고 맞설 용기가 없을 뿐이다.

부적절한 해외연수로 전국민의 비난을 받고 있는 예천군의회의 행태는 사실 각 지자체별 의원연수는 물론 농협임직원 이장협의회 농민단체의 해외연수를 보면 수위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농촌지역에 만연한 부끄러운 관행이다. 그 중에 분명히 몇몇 사람들은 그런 문화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고 옳지 않다고 생각했음에도 그 오래된 관행과 적폐에 맞서고 바꿀 용기가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혹시나 적십자회비와 불우이웃돕기 분담금에 협조하지 않으면 별난 나 때문에 마을주민들이 피해보지 않을까 싶어 주저주저하는 용기 없는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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