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5] 위대한 조직가 최시형

  • 입력 2019.01.27 18:00
  • 수정 2019.04.05 11:14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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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최용탁 소설가

1898년 6월 2일, 오전에 사형 선고를 받은 최시형은 곧바로 그날 오후에 교수형에 처해진다. 동학의 2대 교주이면서 갑오농민혁명 이후 3년여 동안 잡히지 않고 숨어 다니며 교단을 재건한 그가 원주에서 피체된 지 석 달만이었다. 그에게 선고를 내린 세 명의 판사 중에는 그 유명한 조병갑이 있었다. 고부군수로 원한의 만석보를 쌓아 가혹한 수세를 거두어들였고 그에 항의하는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을 때려죽인 그 조병갑이었다. 갑오농민혁명이 시작된 사건이었고 수십만의 농민들이 죽어간 역사의 중대 범인이었다.

그런데 그가 홀연히 판사가 되어 나타나 또 다른 동학혁명의 주역에게 사형을 언도한 것이었다. 주심 판사였던 조병식 역시 최시형이 보은에서 집회를 열고 교주 최제우에 대한 신원운동을 펼칠 때 충청도 관찰사로서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탄압에 나섰던 인물이었다. 근대사 속에는 선악이 뒤집히고 불의가 정의를 단죄하는 수많은 장면들이 있는데 최시형의 재판 역시 그러하였다.

최시형이 누구였던가. 동학 교주 최제우와 가까이 살던 그는 교단에 입도하여 수제자가 되었고 최제우가 순교한 1863년 이래 삼십년 넘는 세월 동안 우리 역사상 최장기 수배범으로 살다간 인물이었다. 흔히 그를 ‘최보따리’라는 호칭으로 부르는데 평생 전국을 떠돌며 조직 활동을 한 그에게 민인들이 붙여준 영예로운 별명이었다. 어려서 고아가 된 그는 삼십대 중반에 이르러 최제우를 만나 도를 얻고 최제우는 ‘천지개벽의 운이 반드시 그대에게서 나올 것’이라며 최시형을 2대 교주로 삼았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내부에서 있었던 갑론을박을 현대에 들어와 해석하면서 최시형에 대해 많은 비판이 나왔다. 특히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남접이 강력한 투쟁을 요구할 때 최시형이 보인 반감이 가장 큰 비판 지점이었다. 나 역시 그 비판에 일리가 있다고 믿지만 그가 봉건왕조에 대해 다시 인식하고 연합전선에 나선 것은 그대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는 전봉준과는 조금 달랐던 것이다. 교단을 이끄는 교주로서, 또 평생을 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활동에 전력을 다했던 그로서는 교단의 붕괴가 눈에 보이는 전면적인 전쟁에 선뜻 동의하고 나서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최제우가 순교한 이후 거의 스러져가던 동학을 다시 조직해 낸 사람이 바로 최시형이었다. 강원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그가 일구어낸 조직들은 결국 우리 역사에 새 장을 연 동학혁명의 씨알들이었다. 그 와중에도 동경대전을 비롯한 동학 경전들을 펴냈고 인내천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향아설위론, 이천식천론 등 혁명적인 철학 사상으로 나아갔다. 최시형이 설파했던 사상은 현대에 와서야 여러 철학자들에게 이해될 정도로 선진적인 것이었다.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최시형 피체지에 세워진 추모비. 장일순이 글씨를 썼다.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최시형 피체지에 세워진 추모비. 장일순이 글씨를 썼다.
해월 최시형의 모습.
해월 최시형의 모습.

 















최시형은 피체되기 직전에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하였다. 손병희와 더불어 세 사람의 수제자가 있었는데 손천민은 스승을 따라 순교했고 김연국은 다른 종파를 만들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최시형의 뒤를 이었다고 하는 손병희 또한 진정한 후계자는 아니었다. 그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을 뿐만 아니라 방만한 교단 운영과 개인적인 사치와 치부 등 동학이 가진 근본적인 이념에서 동떨어진 길로 나아갔다. 손병희는 스승 최시형과 달리 거물콤플렉스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고 끝내 그를 극복하지 못했다. 동학 교인들은 떨어져 나갔고 수많은 유사 종파가 생겨났다.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종교이자 강력한 사회변혁성을 가지고 있던 동학은 결국 그렇게 스러져갔다.

그런데, 해월 최시형이 죽은 지 꼭 30년 후에 그가 피체되었던 원주 땅에서 진정한 그의 후계자가 태어났다. 한살림운동의 정신적 지주이고 살아생전 원주를 떠나지 않았으면서도 현대사 굽이굽이에 생애를 드리웠으며,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 스승으로 모시는 무위당 장일순이 바로 그다. 동학과 최시형은 이 시대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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