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영천포로수용소 그 사내①

  • 입력 2019.01.27 18:00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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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몸이 망가져 서울에서 돌아오니 발로 차버리고 떠났던 가계는 지리멸렬이었다. 생가 어른은 그해 가을 초입에 일흔도 못 채우고 돌아가셨고, 양가 어른도 이미 사망선고를 받아놓은 형편이었다. 숙부의 강압에 의해 동생이 집으로 들어와 앉았으니 나로선 더 이상 양가로 들어가지 못할 핑계거리도 없어졌다. 군대시절 만들어진 족보에 내 이름은 이미 작은아버지 밑으로 입적이 되어 달리 어찌할 입장도 아니었다. 1987년이 저물고 있었다. 그해 봄에 양가로 들어가니 고등학교 때 야반도주했던 그 집이 아니었다. 마을의 세 칸 지기 흙집에서 나와 능금밭에다 새 집을 지어놓고 있었다. 나는 물려받은 능금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나 신명이 없어 자주 시내로 나가 노닥거렸다. 그림 그리는 후배와 보쌀소쿠리 쥐 들락거리듯 술집만 드나들었다.

그해 여름장마 때였다. 비 오는 날 흙탕길 말죽거리 옻닭골목 허름한 술집에서 한 사내를 만났다. 서로 간에 몇 번쯤 취한 꼴을 보여줬던 인연으로 어느 날 우연히 술잔을 주고받은 후부터 우리는 가끔 만났다. 그는 내가 능금농사를 짓는다고 하자 반색하며 여름 병해충 방제 강론을 길게 늘어놓았다. 능금농사만 삼십 년이 넘은 그는 만난 후 처음으로 세상에 대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내 손등을 토닥거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동네에 사느냐는 내 물음에 천장만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했는데, 그 눈 밑에는 그늘이 짙어보였다. 그때 내 눈에는 그가 어딘지 모르게 떠돌이처럼 느껴졌다. 그때만 해도 드문드문 떠돌이 머슴살이들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한 해가 훌쩍 지난 뒤였을 것이다. 어느 날부터 사내가 속마음을 조금씩 열어보였다. 뜯어보니 그 사이에 사내 이마에는 주름이 몇 개 더 그어져 있었다. 그는 철원평야 어느 들판 마을에서 나고 자랐으나 어린 시절은 통 기억하지 못했다. 그날도 유리문 밖으로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떻게 영천까지? 피난민이었냐고, 아마도 나는 그렇게 물었던 것 같다. 피시식, 비웃음을 물었던가? 담배를 꺼내 물며 볼모가 되어 여기까지 왔노라고 그는 말했으리라.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마를 찡그렸다가 펴며 사내는 자신이 영천포로수용소 출신이라는 것을 소주 한잔 목구멍에 털어 붓듯 냉큼 털어놓았다. 뜨악해진 나는 소주잔을 거꾸로 뒤집으려다말고 입에 문 채 빤히 그를 쳐다보아야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포로수용소라니? 내 머릿속에서 포로수용소는 거제도였고, 포로라면 시인 김수영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남도 북도 다 버린 채 중립국을 선택했으나 바다 속으로 뛰어들고만 최인훈의 「광장」 이명준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영천에 포로수용소가 있었다니, 마주앉아 소주를 마시는 이 사내가 한국전쟁 포로였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일그러진 내 표정은 본체만체 사내는 중얼중얼 영천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들이 탈출한 이야기도 꺼내놓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영천을 떠나기 직전이었던 스무 살 때까지의 기억들을 모조리 헤집어보았다. 어릴 때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읍내에서 살았던 고등학교 시절 어느 한 구석에서도 내가 들은 영천포로수용소 기억은 만져지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영천사람들에게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영천에서 그렇게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는데도 휴전협정 고작 4년 뒤에 태어난 내 귀에는 단 한마디도 들려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졸딱무식쟁이가 되어버린 나는 뜨악한 표정으로 술집 주인을 쳐다보았지만 그러나 어쩌겠는가. 간특한 웃음을 빼물고 있는 그녀는 그러나 곡절 많은 서해바다 보령 쪽에서 흘러온 지 겨우 십 년이 지난 사람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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