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4] 광장에 선 민인들

  • 입력 2019.01.20 18:00
  • 수정 2019.04.05 11:13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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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최용탁 소설가

찬바람이 부는 종로 거리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봄부터 계속된 집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었다. 지난 집회와 달리 그 날은 정부 관료들까지 대거 참가한다는 소문이었다. 기대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모여든 이들은 누구였던가. 120년 전, 최초로 광장 민주주의를 연 사람들이 있었다. 역사에 만민공동회라 이름을 올린 이 집회는 민인들이 처음으로 집회와 토론을 통해 자신의 요구를 광장에서 내건 사건으로 근대를 여는 한 서막이었다. 신분과 직업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발언하며 그 속에서 나온 요구를 폐정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집단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했던, 최초의 촛불집회라 할만 했다.

3월에 처음 열린 만민공동회에는 시민과 학생, 장사꾼들 만여 명이 참가했고 대회장은 쌀장수인 현덕호였다. 평화로운 대중집회라는 새로운 형식이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첫 선을 보인 순간이었다. 사실 조선시대 내내 양반 선비들의 연대 서명운동이라고 할 만인소가 있었지만 민인들이 왕을 상대로 집단적인 요구를 할 수는 없었다. 그 자체가 불충이었으므로 만민공동회는 봉건적 질서를 거부하고 일어선 중대한 사건이었다. 첫 집회에서 한 사람의 스타가 탄생했으니, 현란한 웅변 솜씨로 대중들을 사로잡은 스물세 살의 청년 이승만이었다.

순식간에 민주주의의 요람이 된 종로에서 빠르게 각성된 민인들의 요구는 고종을 비롯한 수구세력들을 당혹시켰고 일정하게 그 주장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종도 이미 노회한 정치꾼인데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일에는 뛰어난 특기가 있었다. 바로 일단 민인들의 요구를 수용해 열기가 수그러들면 곧바로 번복해버리는 방식이었다. 만민공동회가 활동한 일년 남짓 기간 동안 고종이 펼친 기만술과 탄압은 현란하기 그지없다. 적어도 민인들을 회유, 기만하는 데에 있어서 고종은 결코 무능하지 않았다.

흔히 3차 관민공동회라고 부르는 1898년 초겨울의 집회는 무려 5일간 계속되었고 열기에 놀란 고종이 요구를 모두 수용하겠다는 조칙을 발표하였다. 대회에서 요구한 6가지의 사항을 받아들임으로서 만민공동회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후에 고종은 또다시 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내부를 이간질하고 황국협회라는 조직으로 묶은 수구세력과 보부상, 관군까지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철저하게 때려 부순다. 분노한 일부는 폭탄 테러와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만민공동회의 스타 이승만도 테러 혐의를 받아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어쨌든 그렇게 막을 내렸다. 어느 나라의 근대사에서도 막 발아된 직접민주주의가 손쉽게 결실을 맺은 적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광장민주주의가 온전한 승리를 구가하기까지는 90년이 더 흘러 6월 항쟁을 기다려야 했다.

만민공동회에 모인 사람들.
만민공동회에 모인 사람들.
박성춘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서양.
박성춘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서양.

 


 

 

 

 

 

 

 

 

3차 만민공동회는 수많은 이야기를 남겼지만 그 중에 널리 회자되는 이가 박성춘이다. 집회에서 첫 번째 연사로 올라와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던 그는 그때까지도 가장 천대받던 백정이었다. 이름도 없이 그저 ‘박가’였던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스스로 신분의 족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자식 세대만큼은 백정이라는 계급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새로운 세상을 봄이 오는 것으로 자신에게는 성춘(成春)이라는 이름을 짓고 아들에게는 제대로 된 새 세상을 맞으라는 뜻으로 서양(瑞陽)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가 바로 세브란스 의전을 첫 회로 졸업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가 된 박서양이다. 그는 안락한 의사의 삶을 살지 않았다. 간도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독립군 부대 군의가 되어 봉오동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간도로 떠나기 전, 박서양이 세브란스의전 교수였을 때 학생들이 백정 출신에게 배울 수 없다며 수업을 거부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놀랍고 끔찍하지만 그 또한 가슴 아픈 우리 근대의 한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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