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주행 트랙터가 아니라 자율주행 호미가 필요하다”

이 사람 ㅣ 지역공동체 만들어 가는 상주농민 조원희씨

  • 입력 2019.01.20 18:00
  • 수정 2019.01.21 15:18
  • 기자명 심증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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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농사경력 25년 조원희. 농민으로써 이름이 있는 사람이다. 지난 25년간 해왔던 일도 많고 하고 있는 일도 많았다. 지금도 그가 맡고 있는 직책이 6~7개가 넘는다. 경북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이곳은 조씨의 고향이다.

농사를 지었던 부모님은 일찍이 자식들을 서울로 보냈다. 그 역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서울생활을 했다. 서울 작은아버지집 근처에 방을 얻어 서울 유학을 했던 것이다. 그 시절 두메산골이나 다름없는 낙동면 승곡리에서 부모님은 어려운 살림에도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 서울 유학을 보냈다.

“지금 얘기로 조기유학을 보냈죠. 형제들과 자취를 했어요. 농사는 고등학교 때부터 생각을 해서 농대를 가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셨어요. 그래서 농대는 못가고 고등학교 때 이과였지만 이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서 이과 중에 가장 문과와 비슷한 지리학과를 가게 됐어요.”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을 보내는 부모의 기대는 농사나 노동이 아닌 안정된 사무직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부모의 기대와 달리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농사짓겠다는 꿈을 꿨다.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고향에 대한 막연한 향수랄까.”

1987년 대학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시대와 조응하게 된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 조원희 역시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됐다.

농사의 시작 그리고 농업의 위기

“1학년을 마치고 군대 갔다 와서 농활 다니고, 총학생회 농학연대사업을 하고, 학교에 농투신모임 만들고 하면서 농민이 될 준비를 했죠.”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진보적 사회진출을 고민하는 학생운동가들에겐 농촌에 들어가는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선택 중 하나였다. 이때 많은 학생운동 출신들이 농촌에 들어왔다.

그 역시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함께했다. 더구나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을 했던 터라 대학 졸업 후 고향에 내려가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그러나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이때가 농촌은 이촌향도가 절정에 이르던 시기인데 남들 다 떠나는 농촌에서 농사짓겠다고 하니 부모님 속이 많이 상하셨겠죠. 자존심도 상하셨을 테고. 집에 못 오게 하면 다른 데라도 간다고 하니까 못 이기고 받아주셨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아들이 농사짓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러다 말겠지, 얼마나 버티겠나 이런 생각도 하셨던 거 같아요.” 1994년 그는 고향에 내려와 논을 밀어서 배 과수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하시던 사과와 곶감농사를 지으며 고향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농촌에 내려오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농산물 개방이 시작됐다. UR협상이 타결된 시점이었다. UR협상 타결은 그동안 세계 무역질서를 규정했던 GATT(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체제가 새로운 무역질서 즉, WTO(세계무역기구)체제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GATT체제 밖에 있던 농산물이 GATT체제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모든 농산물은 일정한 관세를 내면 자유롭게 교역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UR협상의 효력은 1995년 WTO 출범과 함께 발효됐다. 구조가 취약한 한국농업의 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이는 곧 농업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된 것을 뜻했다.

조원희 상주로컬푸드협동조합 이사장이 승곡체험마을 입구의 장승 앞에 서서 밝게 웃고 있다. 경북 상주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온 조 이사장은 “농업을 빙자한 개발을 막고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농정 목표를 재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원희 상주로컬푸드협동조합 이사장이 승곡체험마을 입구의 장승 앞에 서서 밝게 웃고 있다. 경북 상주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온 조 이사장은 “농업을 빙자한 개발을 막고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농정 목표를 재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중까지 나서서 반대한 농민회 활동

“내려오자마자 농민회 활동을 하게 됐어요. 농민회 사무국장도 맡아서 하고.” 청년농민으로 지역활동을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1990년대 후반에 펼쳐지는 농촌의 문제는 모두 청년농민 조원희의 문제이기도 했다.

“김영삼정부의 신농정을 반대하는 집회를 수도 없이 벌였죠. 김영삼정부 후반에 들어선 농가부채 투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고속도로를 막기도 하고…. 그때 상주시농민회 사무국장을 했어요.”

김영삼 대통령은 후보시절 ‘쌀 개방을 대통령직을 걸고 막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1995년부터 쌀 시장이 개방됐다. 우리 농업의 근간인 쌀이 개방된 터이니 다른 농산물은 보나마나였다. WTO체제를 맞아 전면적 농산물 개방을 허용한 정부는 농업의 구조개선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농촌에 막대한 투융자사업을 벌이게 된다.

기계화, 규모화, 자동화 등으로 일컬어지는 농업구조개선사업은 결국 농민들을 빚더미에 앉게 했다. 김영삼정부 말기에 들어서면서 농가부채 문제가 농업문제의 핵심으로 부각됐다. 이후 대통령선거에서 농가부채 해결은 농업공약의 핵심을 차지할 정도였다.

농사짓는 것도 마땅치 않은데 대학 나온 아들은 연일 데모하러 다니기 바빴다. 그렇지 않아도 보수적인 경북지역에서 부모님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원래 상주는 보수적인 지역이 아니었어요. 여기가 풍양 조씨 집성촌인데 영남 풍양 조씨는 세도가가 아니라 남인으로 세도가에 맞서는 역할을 하던 집안이었죠. 그리고 상주는 동학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동학군이 상주읍성을 8일간 점령했던 곳이에요. 그러다가 관군에 쫓겨 보은에 가서 3,000명이 몰살당했죠. 이런 운동이 의병으로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어요. 그런데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 해방 후 돌아와 보니 친일파 세상이 되어 버린 거예요. 그 꼴 보기 싫어서 월북하기도 하고 그러다 전쟁이 나면서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되고 박정희 유신독재에 버티다가 씨가 마르면서 보수화 된 거죠.”

그의 농민회 활동에 대해 부모님뿐 아니라 문중 어른들까지도 큰일 난다고 한걱정을 했다. “종친회에서 조원희 농민회 못하게 하자는 결의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는 대학생활도 하고 사회경험도 있다보니 그의 활동을 극구 반대하지는 않았다.

승곡체험마을, 지역농민·소비자·귀농인의 거점이자 공동체

농산물 개방이 본격화되면서 농업의 구조가 변하는 시점에 시작한 농사. 정부 정책에 대응한 투쟁과 더불어 삶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일도 중요했다. 농사일을 게을리 할 수 없고, 또한 지역에서 함께 살아가는 터전을 만들어 내는 일에도 정성을 쏟았다.

“저는 조직원이면 조직의 강령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전농 강령에 따라 ‘환경보전형 농업’을 실천하기로 했어요.” 그의 주 농사인 사과와 배는 일반적으로 농약과 비료를 많이 쓰는 농사였다. 농사방법을 바꾸며 친환경농업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친환경농사는 순탄치 않았다. “사과 유기농 한다고 몇 년 하면서 다 말아먹고 빚지고 땅 팔아먹고….”

그러면서 생협 초기에 생산자로 참여했다. 생협 활동을 하며 소비자와의 교류, 연대가 시작됐다. “생협의 생산자 활동을 하게 된 것은 농민운동이 소비자의 호응을 얻지 않으면 지속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가 생협 생산자 활동을 하게 되면서 소비자들을 농장에 초대했다. 소비자들에게 농촌을 체험하게 하고 농민을 이해하는 장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소비자들이 주기적으로 농장을 방문하게 되니까 이들이 묵을 수 있는 공간과 교육공간이 필요했어요. 먹거리의 중요성과 농업의 가치를 배우는 교육 공간 그리고 지역공동체의 근거지로 활용할 두 가지 목적을 생각했죠.”

2006년부터 동네 사람들과 힘을 모아 2008년 공사를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승곡체험마을’이 만들어졌다. 승곡체험마을은 지역공동체의 거점으로 역할을 하면서 다양한 사업을 통해 소비자, 귀농인, 지역농민들이 어울리는 공간이 됐다. 승곡체험마을은 대외적으로도 우수사례로 평가됐다.

“정부가 농촌관광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체험과 교육을 했고, 전국에서 세 번째로 식생활 우수 체험공간에 지정되기도 했어요. 그리고 식생활 인프라상도 받았고 2013년 박근혜정권에서는 대통령상도 받았어요. 마을 사람들이 참 좋아했죠.”

승곡체험마을은 농협, 농림축산식품부, 경상북도 등 각종 기관에서 우수 사례로 선정되고 많은 상을 받았다. 전국에서도 성공한 사례로 꼽고 있지만 그의 평가는 다르다.

“개인적으로 이 사업은 실패했다고 봐요. 내 세대가 아니라 후계 세대로 이어지는 사업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또한 우리 마을 성과가 이웃에 전파되지도 않고.” 이는 사업의 성격이나 개인의 역량문제가 아니었다. 그만큼 농촌사회가 빠르게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 활성화를 위해서는 인력확보가 시급해요. 새로운 변혁운동의 동력을 확보하는 차원에서도 그렇고 그래서 귀농·귀촌운동에 주목했죠.” 이렇게 해서 귀농귀촌정보센터가 만들어졌다.

이 뿐만 아니라 ‘상주다운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어 센터장을 맡기도 했다. 2017년에는 상주로컬푸드협동조합을 만들어 이사장도 하고 있다. “로컬푸드협동조합은 220명의 조합원이 참여 하고 있고, 작년 9월에 자체 직매장 ‘상주생각’을 개점했어요. 지역푸드플랜(먹거리계획)이 정착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어요.”

조원희씨는 상주로컬푸드협동조합을 통해 귀농인 그리고 농촌지역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소농들을 지역푸드플랜으로 묶어 활로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다. 상주에는 지역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공동체가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활동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러한 지역공동체에 그는 때로는 주도적으로 때로는 동조자로 때로는 바람잡이도 하며 함께했다.

25년간 쉬지 않고 달려왔지만

“아버지 농사에 이어서, 농촌에 터 닦고, 비전박토지만 땅 조금 물려받아 농사짓다가 IMF 때 빚이 3억원까지 늘었는데 열심히 농사짓고 살아서 빚도 좀 갚았어요. 10년간 행복중심생협 생산자 회장하고, 10년 동안 마을일에 농민회, 귀농센터 등을 하면서 살아왔어요. 보수적인 집안에서 문중일도 17년간 실무일 맡아서 하며 문중의 신임도 얻어야 했죠.”

마을공동체, 생협 생산자, 귀농귀촌센터, 협동조합 장학회, 농민회 등 열심히 활동을 했다. 그래서 나름은 성공한 농민으로 비춰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업은 실패한 게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다. 농업의 미래만큼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문제 또는 지역에서 지역공동체를 복원하고 삶의 터전의 일구려는 활동가들의 문제라기보다 우리 농업의 구조적 문제이고 농업정책의 문제이다.

“지금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서 더 이상 할 게 없어요. 사상 유례없는 개방농정의 속도와 경쟁력 중심, 생산주의 농정에서 농촌은 붕괴하고 있어요. 귀농·귀촌인들이 그나마 농촌의 후계인력인데 이들은 더 취약합니다. 귀농인들이 평균 0.8ha 경작해요. 농지 소유관계를 보면 절반 이상이 임차농지고.”

최근 정부는 농촌취업인력이 늘어나고 있다며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 그래서 농정이 잘되고 있고 농업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선전한다. 그러나 현장의 실제 모습은 다르다. 그 가운데 농촌 후계인력이라 할 귀농인들이 더욱 취약한 농업구조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방농정이 정점에 다다른 지금 중소농 정책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자율주행 호미가 필요하다

“농정의 실패를 인정하고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농정의 목표를 재설정해야 합니다. 농업을 빙자한 개발논리를 막아야 하는데 스마트팜 혁신밸리를 한다고 하니. 지금 자율주행 트랙터가 필요한 게 아니에요. 지금 필요한 것은 자율주행 호미예요.”

그렇다. 지금의 트랙터로도 충분히 편하게 농사짓고 있다. 고작해야 수천 평짜리 농지에서 자율주행 트랙터가 있다고 얼마나 효율적일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자율주행 호미이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데 가장 많은 힘과 품이 드는 일을 편리하게 하는 농기구가 더욱 절실한 상황이다. 농정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팜이 아니라 ‘스마트호미’를 내놓는 농정을 농민들은 갈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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