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옛날 영천극장⑥

  • 입력 2019.01.13 15:32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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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유구한 세월 동안 영천의 원도심은 금호강 남천(南川) 청계석벽 북쪽에 자리 잡은 과전, 창구, 문내, 교촌동이었다. 마현산 아래, 단표누항(簞瓢陋巷)의 딸깍발이들이 많이 살았고 지금도 그 풍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늙은이들만 어슬렁거리는 달동네 교촌동 일대에서 한때를 구가했던 영천극장이 내리막길을 탄 시기는 70년대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교촌동 영천극장이 세워지기 전, 영천은 이미 신시가지를 세울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예로부터 ‘잘 가는 말(馬)도 영천장, 못 가는 말도 영천장’이라는 말과 함께 ‘영천장에 콩 팔러 간다’ 말이 전해져왔듯이 영천은 영남에서도 으뜸가는 곡물 집산지였다. 하지만 문내동 북쪽에 위치한 염매시장이 너무 협소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의 상처가 어느 정도 회복되자 금호강 남쪽 들판에 공설시장과 함께 신시가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자고나면 새 건물이 뚝딱뚝딱 세워졌고 밤거리 불빛이 화려해졌다. 그 과정에서 완산동에는 객석이 훨씬 더 많은 아카데미극장이 문을 열었다. 엄청난 부지에 들어선 공설시장으로 물건을 사고 팔기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장터 부근에 위치한 아카데미극장 주변은 늘 북적거렸다. 세칭 ‘말죽거리’ 일대에 들어선 수많은 요정과 다방이 문전성시를 이루기 시작한 때는 70년대부터였다. 그 무렵부터 농촌 처녀총각들이 도시로 몰려나가기 시작하면서 강북의 영천 원도심은 활기를 잃어갔지만 새로운 도시 중심으로 자리 잡은 완산동 일대에 강북에서 볼 수 없었던 유흥가 군락지가 생겨난 것이었다.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영천능금’이 각광을 받으면서 돈푼께나 만진다는 사내들이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교촌동 일대는 서리 맞은 풀잎처럼 시들어 가더니 어느 날 소리소문 없이 영천극장이 문을 닫아버렸다.

해와 달과 별과 바람만이 아는 폐허의 일제강점기 옛날 영천극장이 그러했듯이 사십 년이 지난 50년대 영천극장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많은 시민들이 영천시가 매입해서 보존해주기를 바랐지만 어느 날 영천극장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원룸 건물이 껑충 솟아올랐다. 청춘들이 눈물짓고 박장대소하던 영천극장, 남진과 나훈아에게 열광한 처녀들의 비명소리와 김추자의 현란한 몸짓에 시퍼렇게 휘파람을 날리던 더벅머리들이 사라지자 교촌동 일대는 팽개쳐진 개밥그릇이었다. 지게작대기 내던지고 가서 산업역군세대로 일가를 이룬 더벅머리 형들과 월남치마 누이들은 어쩌다 영천극장을 떠올리기라도 할까.

몇 해 전이었다. 나는 많은 영천사람들을 호명하며 창구도 옛날 영천극장과 교촌동 영천극장 일대 골목을 수없이 밟아보았다. 그때 내가 쓰고자했던 영천사람들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격동기를 살아낸 인물들이었다. 그들 중에 누구는 일제 앞잡이였고 어느 누구는 일제에 저항한 주의자였고 또 누구는 재건조선공산당과 남로당에 목숨을 걸었으며 더 많이는 지주들의 악행에 몸과 꾀로 맞선 소작인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굳이 영천극장을 두고 시답잖게 이렁저렁 말이 많았던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았다. 그때 아직까지 거기에 영천극장이 서 있었고, 어느 날 문득 그 앞에서 열네 살 한 소년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여기저기 벽이 헐리고 대리석이 떨어져나가 넝마가 된 영천극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 소년, 그 아이가 가만히 내 손을 잡아왔던 것이다. 월남치마를 입고 어린 날 살뜰하게 챙겨주던 누이들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으나 영천극장 몰락은 아이러니하게도 근대산업이 발전하는 과정과 맞물리면서 농촌 붕괴현상과도 잇닿아 있어 가슴만 저릿하게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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