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내 통장으로 주거니 받거니

  • 입력 2019.01.13 18:00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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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아랫녘 끝자락의 들판은 한겨울에도 푸르릅니다.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시금치나 마늘 등 월동작물이 한여름의 빛깔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나는 남해의 이 겨울이 따뜻해서 좋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단 한 철의 휴식도 안 줘서 싫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노루꼬리만큼 짧은 겨울 해를 안고서 시금치를 캐는 농민들의 손놀림이 분주하기만 합니다.

올해는 어쩐지 시금치 가격이 없습니다. 파종기에 넉넉히 내린 비와 초겨울의 온화한 날씨 때문에 발아율과 초기생장이 좋았던 탓일 것이고, 시금치 발아 후 연이은 폭우가 없었던 탓에 월동작물의 주적 노균병 피해가 없다보니 그렇기도 하겠지요. 물론 생산량의 조절 실패나 시장유통의 문제가 더 근원이겠지요. 그러니 겨울추위에 아랑곳 않고 농사일을 하는 농민들의 재미가 떨어집니다.

그 와중에 겨울채소가 나지 않는 웃녘에서 시금치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바닥을 치고 있는 경매가보다 조금 높게 쳐준다 하고 또 그 양도 제법이라 보람찬 마음으로 이웃분께 주문을 했습니다. 배송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송금하겠다고 연락이 와서 계좌번호를 여쭈는데 은행 거래통장이 없다며 그 댁 아저씨분 명의의 통장번호를 가르쳐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댁 언니로 말씀드리자면 우리 동네에서 농사 일머리가 제일 좋으신 분입니다. 일의 동선도 딱 알맞게 배치하여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없습니다. 스스로의 일뿐 아니라 아저씨 일까지도 한 발 앞서 생각해서 해냅니다. 일 매무새 또한 어찌나 야무진지 언니의 손길이 닿은 곳은 뒷손 볼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농사일로 대통령을 뽑는다 하면 나는 이 분을 꼭 추천할 것이고 선거운동도 멋지게 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입니다. 그런 언니가 집안과 마을을 벗어나 사회와 관계 맺는 과정은 단절돼 있는 것이지요. 농협 통장거래를 않는다는 것은 대부분의 과정에서 언니 손을 거친 언니의 농산물이 언니 이름으로 출하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역의 협동조합과 관계를 안 맺는 것이고 그래서 농협 조합원이나 대의원, 이·감사는 물론 조합장의 이름으로 지역의 리더가 될 일도 없고 농업 경제 정책의 대상이 될 리도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여성농민이 농업의 주체이면서도 금융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 댁 언니만의 특수한 경우라고 보기도 하겠지요? 상당수 여성농민이 금융거래통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통장유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농산물 출하를 여성농민의 이름으로도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끔 굳이 아내 이름으로 출하를 할 때가 있는데, 이는 다른 이름으로의 출하가 경매가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이니 올바른 방식은 아니지요. 농업·농촌 기본법에서 농민의 규정이 연 100만원 이상의 농산물 통장 거래실적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농산물 출하를 품목에 따라서, 또 단작의 경우 시기에 따라서 여성농민의 이름으로 해서 여성농민이 진정으로 농업주체로 서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올해가 농촌 성평등의 원년이 되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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