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 당당한 역사의 주체로 서다!

  • 입력 2019.01.06 18:00
  • 수정 2019.01.11 10:56
  • 기자명 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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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모든 자리에 있었지만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했던 여성농민에 주목합니다. 새해를 맞아 ‘오미란의 한국여성농민운동사’를 월 1회 연재합니다. 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가 시간을 되짚으며 풀어내는 여성농민운동의 역사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셨나요.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언제나 여성들의 삶과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은 어렵다. 그것은 여성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이 일반적인 역사적 기록과 달리 이중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묻히고 가려진 여성들의 흔적을 찾아서 들춰내야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의 활동에 대한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재정립하고 의미 부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흔적을 찾는 작업은 정보화가 발달한 2000년 이후는 비교적 용이하다. 그러나 그 이전의 기록과 활동을 찾는 일은 어려움이 많다. 특히 과거의 기록은 기록이 분실되거나 당시의 기억을 간직한 활동가들이 조직 활동을 그만두거나, 지역을 떠난 경우도 있어서 역사를 복원하고 당시의 활동을 제대로 기록하는 일은 늘 어려운 작업이다.

여성농민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여성농민들의 활동이 전체 한국사회, 특히 농업·농촌의 변화과정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부여하는 것은 여성농민들의 정치경제적 소외와 불평등, 지금도 여전히 농촌-농업-농가=남성으로 대표되는 한국 농촌의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농민의 존재와 그들의 주체적 목소리를 재확인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총 12회에 걸쳐서 연재되는 <한국여성농민운동사>는 올해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 탄생한지 30주년을 맞는 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향후 연재될 내용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30년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운동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은 때로 낡은 기록을 들춰내고 사라진 기억과 활동을 복원하고, 그러한 활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은 노력이 역사 속에서, 운동과정에서, 그리고 여성농민의 활동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되고 실천의 방향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역사적 주체란 스스로의 경험과 실천에 대한 성찰, 그리고 그것을 다음세대에 전달하는 일에 참여할 때 온전해질 수 있다는 말처럼 여성농민운동사의 기록이 여성농민을 역사의 주체로 세우는 과정이 되길 바란다.

1989년 12월 18일에 열린 전국여성농민위원회 결성대회 모습.
1989년 12월 18일에 열린 전국여성농민위원회 결성대회 모습.

모든 투쟁에 있었지만,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한 여성농민

농민운동은 1970년대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탈농정책이 가속화되면서 1970년대 가톨릭농민회에서 시작해서, 농산물 수입개방이 구조화된 1980년대에는 기독교농민회로 확장되었고, 이어 1987년 전국농민협회 등 종교적 외피를 벗어난 자생적 농민조직으로 확장되어 갔다.

당시 농민운동은 농민에 대한 착취구조와 정치를 폭로하고, 농민조직화와 권익을 위한 투쟁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투쟁과정에서 1980년대는 독재정권에 대한 대규모 저항이 전개되었고,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 투쟁의 진전을 이룩하면서 전국적인 대투쟁 국면을 맞이하였다.

농민운동 진영에서도 1983~1988년 전국 각지에서 소값 폭락, 고추값 폭락, 마늘값 폭락 등 농산물 가격폭락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가 개최되었고, 여성농민들은 과거처럼 행사의 뒷설거지나 하는 대상이 아니라, 모든 투쟁에서 선두에 서서 투쟁에 참가하였고 때론 막힌 경찰저지선을 뚫거나 폭력진압을 저지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만약 이들 여성농민이 없었다면 전국농민회총연합이라는 전국적인 농민 대중조직의 탄생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농민운동의 어떤 기록에도 여성농민들의 투쟁에 힘입어 조직이 성장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여성농민들의 폭발적인 투쟁은 여성농민운동 활동가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985년 이후 전국의 여성운동은 독자적인 조직화를 추진하였고 이러한 변화와 마찬가지로 여성농민활동가들은 1984년 여성농민운동이라는 이론을 정립하였다.

이후 여성농민운동 활동가들은 조직되지 않는 여성농민 대중들의 자발적이고 폭발적인 진출 앞에서 작은 단위의 지회나 분회가 아니라 대중적인 여성농민 조직의 필요성을 공감하게 되었다. 또한 여성농민들의 독자적인 조직 활동은 여성농민 스스로의 투쟁과 지도역량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전국 최초 여성농민 집회인 1989년 전남 무안의 ‘의료보험 현물납부투쟁’과 ‘고추값제값받기투쟁’, 충남 부여의 ‘농협출자금반환투쟁’ 등 크고 작은 여성농민들의 투쟁을 주도했고, 이를 통해서 독자적인 여성농민 조직을 건설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1991년 3월 9일 전남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전남여성농민회 결성대회에는 7개 군 500여명의 여성농민이 참석해 “여성농민 단결하여 우리세상 만들어보세”라고 외쳤다.
1991년 3월 9일 전남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전남여성농민회 결성대회에는 7개 군 500여명의 여성농민이 참석해 “여성농민 단결하여 우리세상 만들어보세”라고 외쳤다.

단일한 전국 여성농민 조직이 만들어지다

전국농민회총연합(1989년 3월 창립, 현재 전국농민회총연맹)과 마찬가지로 여성농민운동 단일조직인 전국여성농민위원회(현재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여농)는 1989년 12월에 결성되었다.

여성농민운동 전국 단일조직이 결성되기 전까지 1977년 가톨릭농촌여성회, 1977년 가톨릭농민회 여성부, 1984년 기독농민회 여성위원회, 1987년 전국농민협회 여성부 등 다양한 조직의 여성농민 활동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들 조직은 1989년 전국여성농민위원회를 창립하기까지 많은 역할을 하다가 전국여성농민 단일조직이 결성되자 스스로 해체하였다.

가톨릭농촌여성회는 주로 경기도 중심으로 성당의 공소단위를 중심으로 여성농민들을 교육하는 활동을 했으며, 초기에는 보건교육, 소규모 경제활동, 농촌현실 알리기 등의 활동을 추진하였고 ‘농촌부녀’라는 소식지를 발행했다. 이후 1985년 소식지 명칭을 ‘여성농민’으로 변경(1984년 전주 이서에서 여성농민지도자교육 이후 농촌여성운동을 여성농민운동으로 명확히 함)하였다.

또한 가톨릭농민회 여성부와 기독교농민회 여성위원회는 전국단위로 여성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실시하고 마을이나 지역에서 여성농민들의 투쟁활동을 지원하는 과정을 통해서 조직화를 추진하였다.

당시 농민조직에 속한 여성농민들은 대부분 농민운동을 하는 남편의 부인들이었다. 초기에는 남편들의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회원 부인들에게 농민운동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과정은 중요했다. 따라서 전국단위 조직의 실무자들이 지역의 농민회원 부인들을 모아서 농민문제에 대한 교육을 통해 농촌현실을 인식시켜 농민투쟁에 참여함과 동시에 농민운동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주요한 활동이었다.

가톨릭농민회 여성부는 전국단위로 마을단위를 중심활동으로 분회를 조직하였다(경남 고성, 경북 성주·안동, 전남 영광·나주, 충남 부여 등). 이들은 주로 농민회 분회가 만들어진 곳에 여성들이 조직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활동들은 농지세 등 실생활과 연계된 활동, 농민투쟁시 식사나 행사준비 등의 활동을 담당하였다.

반면 기독교농민회 여성위원회는 시군지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전남 무안, 전북 고창, 충북, 충남 부여, 경북 상주 등에서 농지세 투쟁, 의료보험 투쟁,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들을 앞장서서 추진하였다.

전국농민협회는 여성부 활동이 함평을 제외하고는 활발히 전개되지 않았다. 이후 4개 조직은 전국여성농민 단일조직을 건설하기로 합의한 이후 농민회와 달리 모두 해체하였다(농민회의 경우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가 일정기간 유지됨).

여성농민 독자조직의 건설은 최초로 전남에서 시작되었다. 1988년 무안여성농민들의 조직화 이후 전남여성농민회 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이후 전국여성농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남은 여성농민운동 독자조직 건설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에서 발간한 소식지 ‘여성농민'의 표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에서 발간한 소식지 ‘여성농민'의 표지.

땅을 사랑한 땅의 사람들

한국사회 운동조직의 확산과정에선 교육을 빼놓을 수 없다. 수많은 활동가들이 크리스천아카데미 교육을 통해서 배출되었고, 이렇게 성장한 활동가들이 다양한 종교조직의 외피를 입고 현장을 지원하는 활동을 실시하였다. 현장활동에 대한 지원으로 여성농민 관련 지원을 지속적으로 실시한 조직이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교육(1984년~1987년)이다.

이후 이들 중 일부와 가톨릭농촌여성회 등에서 활동했던 활동가들이 여성농민을 위한 모금위원회(땅의 사람들, 땅사)를 결성하여 여성농민 조직화를 위한 교육활동을 지원하였다.

땅사는 교육활동 지원만이 아니라 활동가들의 활동비를 지원하기도 하고, 혹은 땅사 활동가들 중 일부는 전국여성농민회 조직화 활동의 핵심적인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땅사는 여성농민 전국조직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후원활동을 하다가 현재는 해체되었다. 땅사가 여성농민운동의 외연조직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점은 지금까지도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듯 전국여성농민회는 4개의 조직과 후원조직의 인큐베이팅을 통해서, 그리고 각종 투쟁현장에서 당당한 투쟁을 통해서 단련되고 성장하고,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세상 속에 우뚝 서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통일농업과 지속가능한 미래농업, 성평등한 일터와 행복한 삶터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다음 연재부터는 여성농민운동의 성장과정을 함께 공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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