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전차① ‘딸랑이 차’를 아십니까

  • 입력 2019.01.06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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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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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 첫사랑 떠나간 종점 / 마포는 서글퍼라

정두수가 노랫말을 짓고 박춘석이 곡을 만들고 은방울 자매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가요 ‘마포종점’의 제1절 가사가 이렇다. 이 노래의 제2절에는 당인리 발전소도 나오고 여의도 비행장도 나온다. 그래서 ‘마포 종점’은 지금도, 서울에서 살았던 나이 든 축에게는 아련하면서도 ‘서글픈’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 노래가 발표됐던 때는 1968년이었다, 그런데 그 해 11월에는 서울에서 모든 전차가 사라져버렸다. 전차가 한창 운행될 때 발표됐음직한 이 노래가, 왜 서울거리에서 전차의 레일이 철거돼버린 시점에 나왔을까? 아마도 그 동안 시민의 발 구실을 해온 전차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데 대한 아쉬움을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라는 구절로 은유한 게 아닐까?

나는 1970년에 서울에 올라갔으므로 유감스럽게도 전차를 구경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전차이용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려면 어디 가서 누굴 만나는 게 좋을까? 그래서 2002년도에 찾아간 곳이 ‘서울 토박이회’ 소속 회원들이었다. (그런 단체가 실제로 있느냐고? 지금은 오히려 조직이 더 커졌다. 인터넷을 찾아보시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동에 있는 한 건물의 지하 주차장. 이 주차장의 관리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은, 오래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정년퇴임한 금년(2002년 기준) 예순여덟 살의 김기호 씨다. 그는 태어난 이래 한 번도 왕십리를 떠나본 적이 없는 왕십리 토박이다.

좁다란 주차장 관리실에 역시 왕십리에서 나고 자란 그의 평생지기 한 사람이 찾아왔다. 예순아홉 살의 신현기 씨다. 나는 ‘전차’라는 화두만 툭 던졌는데, 60년을 넘게 동무간의 우정을 쌓아오고 있다는 두 사람이 왕년에 전차를 타고 다니던 얘기를 중구난방으로 늘어놓는다.

“효자동에서 출발한 전차가 저기 원효로까지 갔어. 동대문에서 노량진까지 가는 노선이 있었고, 서대문에서 마포 가는 노선도 있었고.”

“환승도 했어. 지금 전철 2호선 타고 가다가 다른 노선으로 갈아타는 것처럼….”

“그땐 전차를 ‘딸랑이 차’라고 했지. 자동차 같으면 경음기 대신으로 딸랑딸랑 종을 흔들었거든. 그래서 딸랑이 차라고….”

“그 딸랑딸랑하는 소리는 종을 매달아 놓고 흔들어서 내는 소리가 아니야. 전차 운전수가 운전을 하다가 바닥에 있는 페달을 밟으면 그때 딸랑이 소리가 나는 거라니까.”

“자넨 참 자세히도 봤네 그려.”

“(여 차장 흉내)다음은 동대문 정거장입니다. 동대문 정거장에서 내리실 분은 출구 쪽으로 나와 주세요. 환승전차를 타실 분 중에 아직 확인을 받지 못 하신 분은, 전차표를 가지고 미리미리 앞으로 나와 주세요. 동대문, 동대문 정거장입니다.”

“하하하하….”

두 사람이 배꼽을 잡고 웃는다.

시내버스가 대중교통으로 자리 잡기 이전까지 전차는 도시 교통의 총아로 각광을 받았다. 물론 전기의 힘을 동력 삼아서 달리는 모든 차량을 전차라고 할 때, 지금 우리가 ‘전철’ 혹은 ‘지하철’이라고 부르는 대도시의 전동차나, 현재의 고속전철도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전차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일반적으로는 일제 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 서울·부산·평양 시내의 도로 위에 궤도를 설치해 놓고 그 위를 달리던 교통수단을 일컫는다.

이제부터 서울 토박이 할아버지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 시절 서울 시내를 달리던 전차 얘기를 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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