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2] 어느 여인의 이름

  • 입력 2019.01.06 18:05
  • 수정 2019.04.05 11:13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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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탁 소설가
최용탁 소설가

<제2회>

글을 쓰면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호칭 때문에 고민하는 때가 더러 있다. 이를테면 수군통제사라는 동일한 직책이었지만 이순신에게는 당연히 장군을 붙이는데 반해 원균에게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시대가 준 소임을 다했느냐, 되레 해를 끼쳤느냐에 따라 후세의 평가가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호칭 역시 역사적 책임과 연관 짓는 게 상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늘 곤혹스러운 인물이 고종의 비인 민자영의 호칭이다. 민비라는 호칭이 널리 쓰이다가 어느새 명성황후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이에는 뮤지컬과 드라마가 끼친 영향이 컸겠으나, 나는 개인적으로 명성황후라는 호칭을 결코 쓰지 않는다. 얕은 공부 탓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민비가 왕비로 있던 29년 동안이 한 나라가 어떻게 망가지고 무너지며 민인들이 얼마나 참담한 지경에 떨어지는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세계사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그 원흉은 부패가 일상화된 봉건왕조와 그 무리들이었으며 그 중에도 핵심인물이 민비였다. 민비가 마구잡이로 등용한 민씨 일족이 저지른 수탈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결국 수많은 민인들이 지옥과도 같은 처지에 떨어져 신음하며 죽어갈 때 그녀는, 단 한 번도 백성을 생각해 본 적 없는 민비는 오직 권력욕과 사치 속에 빠져 지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느 외세라도 끌어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사치를 위해서라면 어떤 국부라도 팔아치우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나라를 망국으로 몰아간 원흉이자 존재 자체가 만행이라고 할 만한 여인이었다.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인들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인들

민비가 실제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인식되게 된 계기는 당연히 을미년에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궁궐에 다른 나라의 자객들이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한 사건은 고금에 없던 일이고 민족사 최대의 치욕이 분명하다. 봉건왕조 시대에 국모로 불리던 왕비가 비참하게 살해되었다는 충격과 일제에 대한 오랜 증오가 맞물리며 민비는 마치 외세에 저항하여 국권을 수호하려 했던 것처럼 서서히 승격되었다. 더하여 소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죽은 지 이년 후에 황후로 추존되어 명성황후라는 일종의 자기 최면적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대한제국이란 얼마나 황당한가. 붕괴 직전에 이른 왕조가 단말마적으로 독립과 반동을 뒤섞어 연출한 어처구니없는 한 편의 소극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민비는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이 저지른 죄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인물이 되었다.

진위논쟁이 있는 민비의 사진들
진위논쟁이 있는 민비의 사진들

민비 시해는 일본 정부가 계획하고 조선에 부임했던 총영사 미우라가 지휘한 사건이었지만 가담했던 자들 중에는 조선인들도 있었다. 외세에 빌붙어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자들의 정체는 조금 복잡하다. 개화파에 뿌리를 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시세에 영합하여 입신을 노리는 자들도 있었으나 근본적인 원인은 이미 썩은 울바자처럼 무너지기 직전인 봉건 왕조의 부패와 민심의 이반이었다. 궁궐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일본 낭인들을 안내하고 민비 시체의 소각과 인멸을 담당했다고 전해지는 조선인 가운데 중심인물은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이었다. 민비가 친러시아 정책을 펴면서 일본과 가까웠던 훈련대를 해산하려 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일본 편에 선 것이었다. 궁궐 수비를 맡은 훈련대장이 가담했으니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범선은 사건 후에 검거를 피해 일본으로 달아났다가 고종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고 그가 일본 여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우리나라 육종학에 큰 자취를 남긴 우장춘 박사였으니, 이 또한 역사가 때로 보여주는 신기한 우연이다.

대한제국이 성립하고 역대 여러 왕과 왕비가 동시에 황제와 황후로 추존되었으므로 부르려면 그들 모두를 황제와 황후로 불러야 옳다. 굳이 민비만 황후라고 호명될 이유는 없다. 민비 사후에 고종의 비로 간택된 여인이 있었다. 역사에 김씨라고만 남아있는 이 여인은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려 이십여 년 동안 남편인 고종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쓸쓸히 죽어갔다. 역사는 때로 이토록 잔인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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