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1] 독립이란 무엇이드뇨

  • 입력 2019.01.01 00:00
  • 수정 2019.04.05 11:13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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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최용탁 소설가

지금이야 웬만큼 명료해진 독립이라는 말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갑오년에 스러진 농민혁명에서 크게 내건 기치가 ‘척양척왜’이니 그 속에는 당연히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물리치겠다는 어기찬 뜻이 들어있었다. 그래도 독립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독립이라는 단어가 영어 ‘Independence’를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만든 말이어서 이 나라 백성들에게는 참으로 낯선 단어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로부터 쓰던 말은 아니었으나 독립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 뜻하는 바가 사무쳤으니 이미 스스로 서기에 너무 허약해진 나라였던 것이다. 봉건 시대에 평등이라는 단어가 준 충격만큼이나 독립은 절박한 과제였고 역시 먹물 든 이들이 먼저 쓰기 시작하였다. 하여 독립협회니 독립문, 독립관 같은 것들이 생겨났고 그 중에도 민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독닙신문’의 등장이었다.

혹자는 독립신문의 등장을 근대가 시작하는 한 지점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 만큼 의미가 큰 일대 사건이었다. 우선 여전히 천대받던 순 우리말로 발간하며 최초로 띄어쓰기를 했으며 비록 제호 만이었지만 가로쓰기를 실험했다는 것이다. 그 뜻이 ‘상하귀천이 모두 알아보기 쉬울 터이라’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희미하게 뜻이 잡혀오던 민주주의를 앞세웠다는 점에서도 역시 그러하였다. 언문일치라던가, 신문의 유통 방식, 적극적인 외신 보도 등 외형적으로 독립신문은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이 틀림없으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아쉬울뿐더러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한다. 농민군과 의병에 대해 시종일관 적대적인 관점을 유지했고 맞지 않는 옷처럼 황당한 계몽도 곳곳에 출몰한다. 조선인도 이제 밥이 아니라 고기와 빵을 먹어야 한다거나 이틀에 한 번씩 목욕을 해야 한다는 주장 같은 것들이야 웃고 넘긴다 해도, 이토히로부미를 ‘조선독립의 은인’으로 칭송하는 대목은 실로 아연실색할 일이다.

물론 본질은 따로 있었다. 독립신문이 창간된 때가 1896년 4월 7일(이날이 지금 신문의 날이다), 여기서 첫 번째 혼란이 생긴다. 이때의 독립은 대체 누구로부터의 독립이란 말인가. 이미 여러 외세들이 조선을 간섭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어느 나라의 식민지, 혹은 속국은 아니었다. 독립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우선 일본을 떠올리게 하지만 당시의 독립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강력하게 부추기는 세력이었다. 여기에는 청나라가 쇠락하고 조선이 혼란에 빠졌으며 일본이 침략 야욕을 본격화하는 복잡한 정세가 얽혀 있었다. 더 크게는 급속히 팽창한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의 길을 걸으며 벌어지는 세계사적 대 변전과 연관되지만 이런 정세를 읽을 눈이 우리에게는 없었다. 어쨌든 아직 조선을 가장 강력하게 규정하는 힘은 중국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대의 예를 다하며 조공을 바치던, 주종관계라고 해도 반박하기 어려운 그 조건이 바로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의 독립을 지원하게 했다.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기 위해서는 조선이 중국의 아우 나라이거나 속국이어서는 곤란한 것이었다. 이미 갑오을미 연간의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하고서도 곧바로 이어진 삼국간섭으로 좌절했던 경험을 일본으로서는 잊을 수 없었다. 그러자면 보다 정교하고 치밀해야 했다. 우선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게 일본의 이익에 맞는 것이었다. 독립이라기보다는 아직 전면적으로 부딪치기 껄끄러운 중국에서 떼어놓기라고 해야 할, 일본의 침략 전략이었다.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파리의 개선문을 본딴 독립문을 세운 속내 역시 그러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이래로 개화파를 지원하여 청나라를 대신하려 했던 일본의 의도는 이 땅의 민인들에게 과연 독립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일대 혼란을 일으켰음에 틀림없다. 이후 독립, 해방, 광복 같은 말들이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지면서 때로는 뒤섞여 쓰이기도 하면서 서서히 우리가 성취해야 할 근대의 제일 과제로 떠올랐다. 그 과제는 오늘날까지 진행형이자 더욱 복잡한 가지를 뻗는 뿌리가 되었다. 근대사 첫 머리에 ‘독립’이라는 단어를 화두로 든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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