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옛날 영천극장⑤

  • 입력 2019.01.01 00:00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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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3. 어두운 기억의 저편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내가 처음으로 본 영화는 <저 하늘에도 슬픔이> 였을 것이다. 구두닦이 소년가장 이윤복 일기가 책으로 나오고 그 이야기가 1965년엔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당시 이 영화는 워낙 유명해서 내가 다니는 두메산골 학교까지 와서 돈을 받고 상영했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다. 대구 구두닦이 소년 이윤복 이야기는 그야말로 교실 안이 눈물바다였다.

가끔씩 떠돌이 약장수들이 와서 동네 천변이나 논바닥에 설치한 가설무대에서 영화를 보여주곤 했는데, 허장강과 박노철의 연기에 몰두할만하면 어김없이 필름이 끊어지는 바람에 영화 한편을 온전하게 본 적이 없었다. 고장 난 영사기를 고치는 막간만 이용해서 소개할 것이 있다더니 약을 팔았고 약이 다 팔렸다 싶으면 그걸로 파장이었다. 필름이 그렇게 자주 끊어지는 이유가 낡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순전히 약장수들 전략이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영천극장을 처음 보게 된 때는 국민학교 졸업 후에 지게목발 두드리던 겨울 어느 날이었다. ‘전신만신 백구소주’라고 선전하던 그 소주를 잔도 없이 강변에서 돌려가며 나발 부는 ‘따발치기’로 술을 배우고, 아버지 머리맡에 놓인 필터 없는 그 담배 두세 개비씩 빼내 와 ‘뻐끔담배’를 피우던 때, 사각성냥 한쪽 귀퉁이를 살짝 찢어내 담배와 성냥개비를 돌가루(시멘트)포대에 싸서 다니던 시절이었다. 동네 형들과 물거리를 해서 팔아 모은 돈으로 오십 리 서쪽 읍내 영천극장 안으로 들어간 것만으로도 나는 감동이었다. 당시 내가 사는 곳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운주산 아래 마을로 들어간 막차는 이튿날 아침이면 읍내로 가는 첫차였기 때문에 종점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여러 마을 처녀총각들이 모여 궁리해낸 것이 바로 그 버스를 대절하자는 것이었다. 자갈길 오십 리 밤길의 영천극장까지 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버스기사인들 그 가욋돈을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호롱불 밑에서 콧구멍 그을려가며 가마니치고 새끼 꼰 형들과 틈만 나면 홀치기에 매달린 월남치마 누나들 덕분에 어린 나는 드문드문 불빛이 휘황찬란한 영천극장을 들락거렸다. 영천극장은 영화만 상영하는 곳이 아니었다. 만담가 장소팔과 고춘자가 와서 사람들 뱃살을 곧추었다. 그리고 페티 김이 있었고 김추자가 있었다. 남진이 왔다 가면 그 라이벌 나훈아가 와서 청춘들 가슴을 들끓게 했다.

영천극장은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 전쟁의 아픔과 보릿고개를 넘어가던 고단함이야 여전히 세상을 휘감고 있었지만 청춘남녀들의 끓는 욕망은 그런 것쯤이야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어떤 아픔이나 슬픔이며 고난도 청춘들 몫이 아니라 아버지들이 감당해야 할 채무일 뿐이었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청춘들은 누려야 할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모내기철만 아니라면 그들 청춘들은 밤이 되면 서로 만나야만 했다. 그래서 때로는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버스에 탔던 숫자보다 영화보고 돌아오는 숫자가 둘이나 넷이 모자랄 경우가 있곤 했다. 처녀총각이 영화 핑계로 읍내에 나갔다가 극장에서 살그머니 빠져나와 어딘가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다가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집까지 걸어와야 했던 경우는 시시해서 이야기 축에도 들지 않았다. 누구누구는 극장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이내 빠져나와 역으로 가서 밤기차 타고 서울로 갔느니 부산으로 갔느니 하는 뒷말이 나돌아야 그나마 귀가 쫑긋해졌다. 열여덟 누나는 부산에서 머리채 잡혀 끌려왔고 갓 스물 누나를 잡으러 갔던 아버지는 배가 불룩한 딸을 보자 차마 어쩔 수 없어 돌아왔다는 소문 속에서도 그러나 청춘들의 만남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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