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농민권리선언과 한국 농정

  • 입력 2019.01.01 00:00
  • 수정 2019.01.07 10:30
  • 기자명 윤병선 건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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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선 건국대 교수
윤병선 건국대 교수

흔들리는 촛불

새해를 맞이할 때면 항상 희망을 이야기한다. 2018년은 더욱 그러했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정부의 실질적인 원년이었기 때문이다. 2017년의 농정은 박근혜정부에 의해서 만들어진 정책들을 정리하는 해였기에 2018년에는 희망의 농정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내년에도 농사짓자”는 수많은 백남기는 농업의 가치와 농민권리, 식량주권이 녹아들어간 헌법 개정이 2018년에 이뤄질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갖고 새해를 맞이했었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선 이후 출범한 농정개혁위원회도 이를 담아내고 있는 무언가를 내놓을 것으로 기대를 갖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농업의 ‘공익적 기능’이라는 한 마디만 삽입돼 제안된 개헌안은 국회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다. 또한, 작년 2월말 충북에서부터 시작됐던 농정개혁위원회의 전국순회공청회는 농민진영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이뤄진 만큼 각 지역의 농민들이 기탄없이 의견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자리로 여겨졌지만, 거기까지였다.

엉뚱한 곳으로 새나가는 것 많은 보조금 중심의 농정에서 직불금 중심의 농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경쟁력 강화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답변으로, 그동안의 농정에서 배제돼 온 중소가족농이나 여성농민을 농정의 중심에 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농-농 갈등으로 치부하는 답변이 나오기도 했다.

공청회가 이어지는 사이에 문재인정부 초대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자리는 공석으로 됐지만, 농민들은 문재인정부의 농정이 연속성을 가지고 진행될 것이라는 현장의 고위공무원의 답변에 신뢰하면서 진지하게 공청회에 임했다. 그리고 순회공청회를 통해서 확인된 내용들을 총괄하는 토론회를 약속했지만, 해를 넘겨버렸다.

정부, 농민권리선언 채택에 기권으로 일관

순회공청회에서는 유엔 인권위원회 이사국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국이 박근혜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농민권리선언’ 채택에 기권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에 대한 질타도 있었다.

당시 차관보는 이에 대한 내용을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며 부처 간 협의를 거쳐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변했지만, 지난 정기국회에서 오영훈 국회의원의 질의를 통해서 확인된 바와 같이 농림축산식품부와 외교부간의 협의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긍정적인 검토도 이뤄지지 않았다. 인권이사회의 실무그룹논의에서 한 차례도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던 한국은 유엔 총회에서도 기권을 선택했다.

한국의 기권과는 상관없이 지난해 12월 17일에 열린 유엔 총회에서 찬성 121개국, 반대 8개국, 기권 54개국으로 통과된 결의안은 농민과 농촌지역민의 정의에서 시작해서 국가의 일반적 의무, 평등·차별금지, 여성농민과 여성 농촌지역민의 권리, 개인의 생명권·자유권·안전권, 적절한 먹거리에 관한 권리 등 개인 및 집단적 자유에 대한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유엔의 농민권리선언에는 비아캄페시나의 핵심적인 주장인 식량주권은 ‘적절한 먹거리에 대한 권리’로 축소됐다는 한계가 있지만, 적절한 수입과 생계·생산수단에 대한 권리, 토지와 기타 천연자원에 대한 권리, 종자에 관한 권리, 생물다양성에 대한 권리 등 기업중심의 농식품체계에서 이들의 농기업의 이해와는 배치되는 조항들도 다수 포함시키는 성과를 이루었다.

우리가 유엔의 농민권리선언에 대해서 주목하는 이유는 현재의 농식품체계로는 농업과 먹거리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에서 명확히 하고 있기 때문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들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민만이 주권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권리를 별도로 선언하게 된 이유는 농민이나 농촌지역민의 생활이 상대적으로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시지역에도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농민들의 권리를 특정하여 선언문을 채택한 것은 농민들의 권리를 지켜내는 것이 우리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지키는 것이라는 인식에 대한 호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일 많은 사람들이 기업농들에 의해서 농업과 먹거리의 지속가능성이 확보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유엔의 농민권리선언은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통과된 농민권리선언은 무엇을 생산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가의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농민권리선언은 지금의 관행화된 농업생산방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요구하고 있다. 녹색혁명형 농업에 따른 화학비료의 확산은 퇴비 등을 통한 토양자체의 질소생성 능력이 파괴되기 시작했고, 정부의 산업적 농업육성정책은 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렇다고 유기농업이 제대로 된 길로 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산업적 유기농이 관행농업의 뒤를 잇고 있기 때문이다. 인증이라는 제도가 중심이 되면서 생산과정의 생태적 순환이라는 지향점은 사라졌다. 유기농을 실천하는 농민들이 공동 작업으로 생산했던 퇴비는 산업적 유기농자재로 대체됐다. 농민이 만든 퇴비는 판매를 목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었기에 자본의 입장에서는 제거의 대상, 먹잇감에 불과하게 되었다.

더욱이 농업에 적용된 근대과학은 최적의 수준에서 가용노동력을 투입하는 방식을 고민하기 보다는 노동투입량 자체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대형기계 중심으로 개발돼 농업도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으로 돼버렸다. 과거 농업이 수행했던 다원적 기능의 상당 부분이 훼손돼 버렸고, 심지어 농업생산 자체가 생태계를 위협하고, 그 결과가 거꾸로 농업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화살이 됐다.

이런 점에서 농민권리선언은 자본의 지배에 순응하는 농업으로는 먹거리의 안정적인 생산이나 생태적 지속가능성이 달성 불가능하다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 농민 중심의 농업과 이에 결합된 사회적 생태계를 만들어 가야 할 권리와 책무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중앙이나 지방정부에 대해서는 자본의 지배를 강고히 만드는 농정이 아니라, 농민들이 이러한 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농정을 요구하고 있다.

농민권리선언이 지난해 12월 17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제73차 총회에서 찬성 121표, 반대 8표, 기권 54표로 회원국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통과됐다. 우리나라 정부는 농민권리선언 채택 과정에서 기권으로 일관했다. 유엔TV 갈무리
농민권리선언이 지난해 12월 17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제73차 총회에서 찬성 121표, 반대 8표, 기권 54표로 회원국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통과됐다. 우리나라 정부는 농민권리선언 채택 과정에서 기권으로 일관했다. 유엔TV 갈무리
농민권리선언이 지난해 12월 17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제73차 총회에서 찬성 121표, 반대 8표, 기권 54표로 회원국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통과됐다. 우리나라 정부는 농민권리선언 채택 과정에서 기권으로 일관했다. 유엔TV 갈무리
농민권리선언이 지난해 12월 17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제73차 총회에서 찬성 121표, 반대 8표, 기권 54표로 회원국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통과됐다. 우리나라 정부는 농민권리선언 채택 과정에서 기권으로 일관했다. 유엔TV 갈무리

농정 담당자, 농민권리선언부터 필독해야

새해 정부의 정책 중에는 스마트팜 밸리조성 사업처럼 여전히 자본을 중심에 두고 농민을 언저리로 내모는 정책도 있지만, 일부는 농민권리선언의 방향과 함께 하는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지역단위 푸드플랜 구축사업, 학교급식을 넘어선 공공급식 확대사업, 공익형 직불제 시행 등은 농민권리선언에 담긴 내용의 실천이라는 측면에 보더라도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지역단위의 먹거리 선순환을 지향하는 푸드플랜 구축사업은 과거 농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별 주력품목육성과 맞물린 규모화정책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농정의 사각지대에 있던 중소규모의 농가들이 지역먹거리전략을 통해서 지역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핵심주체로 나설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 내 신뢰와 순환, 상생체계의 구축은 생태적 농업의 활성화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더욱이 먹거리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공공급식의 확대가 이뤄지면 먹거리 기본권도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소외계층에 대한 먹거리 접근이 보다 수월해지면 먹거리 결핍으로 인한 영양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훼손된 인간의 존엄성도 회복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지역 내 협치의 구조를 만들어 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함에도 과거의 농정방식과 동일하게 공장식 벽돌생산이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사례들을 보게 된다. 지역의 농민들을 주체들로 내세우는 구체적인 고민보다는 농민을 대상화하는 판박이 매뉴얼이 난무할 것이라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공익형 직불금의 시행도 농민이 농사짓는 것 자체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시장만을 바라보고 짓는 농사가 아니라, 짓고 싶은 농사를 가능하게 하고, 살고 싶은 농촌에서 살 수 있는 것이 가능하게 만드는 공익형 직불금은 확대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농산물가격이 제대로 유지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농업·농촌의 경제적 지속가능성은 확보할 수 없다. 공익형 직불제를 명분으로 가격유지정책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농업과 관련된 예산은 묶어둔 채,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꼼수가 공익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돼서는 안 된다.

몇몇 지자체에서 시행예정에 있거나, 검토단계에 있는 농민수당도 마찬가지다. 주어지는 수당이 소액이어서 생활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농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또 다른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수당에는 농민권리선언이 강조하는 여성농민의 권리는 보이지 않는다. 농민권리선언은 여성농민은 남녀평등의 원칙에 근거해서 직접적인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농민수당처럼 새롭게 구상되는 정책들은 가부장제의 퇴적물로 곳곳에 남아있는 불합리한 체계들을 개선하고 이를 해소하는 수단으로도 활용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다.

농사일의 절반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여성농민이 농가에 파묻혔다. 적고 많고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담아내는가가 중요하지만, 행정상의 편의 등을 이유로 고민을 접고 있다. 더욱이 농민수당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정책 아젠다 경쟁에 파묻혀서 본래의 취지가 무색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충남의 한 지자체는 기존에 ‘농업환경실천사업’으로 농가당 1년에 36만원씩 지급되던 것에 14만원을 더해서 농가당 연 50만원을 지급하겠다면서 농민수당으로 포장하겠다는 것이다. 중앙정부의 농정개혁 의지가 명확하지 않다보니 지자체의 농정도 갈피를 잡지 못할 수밖에 없다.

이제 새해는 밝았고, 문재인정부나 민선 7기 지방정부에 주어진 시간도 그만큼 사라졌다. 늦었지만, 농정의 방향이 올바른 가치와 지향을 담보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 나침판이 유엔 농민권리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농민도 그러해야겠지만, 중앙과 지방의 농정 담당자들은 농민권리선언을 읽어보는 일로 새해 업무를 시작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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