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한 일에 맞서 아스팔트 위에 서다
부당한 일에 맞서 아스팔트 위에 서다
  • 심증식 편집국장
  • 승인 2018.12.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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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 이 사람 ㅣ 전남 무안 농민 배종렬씨
배종렬 전 전농 의장은 여전히 현역 운동가다. 농민운동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일에 맞서 늘 아스팔트에서 마주할 수 있는 농민운동계의 원로다. 지난 16일 전남 무안 자택에서 만난 배 전 의장은 지난 삶의 이력을 생생하게 풀어냈다.
배종렬 전 전농 의장은 여전히 현역 운동가다. 농민운동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일에 맞서 늘 아스팔트에서 마주할 수 있는 농민운동계의 원로다. 지난 16일 전남 무안 자택에서 만난 배 전 의장은 지난 삶의 이력을 생생하게 풀어냈다.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농민들이 모이는 투쟁의 현장인 아스팔트 위에 항상 눈에 띄는 분이 있다. 생활한복 차림에 긴 수염이 상징인 원로농민 배종렬씨다. 배씨를 아는 사람은 전 전농 의장, 전남서남부채소농협 조합장 정도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배 전 의장은 농민운동의 역사를 끌어 왔으며 여전히 농민운동 현장이라 할 아스팔트를 지키는 ‘현역 운동가’이다.

기자가 그를 찾기 며칠 전, ‘밥 한 공기 300원 보장’과 민주당이 야당시절 주장했던 쌀값보다 못한 목표가격 제시에 항의하기 위해 국회 의원회관을 찾은 농민들을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외면하는 일이 있었다.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전해들은 배 전 의장은 과거 이해찬 대표와의 인연을 회상했다.

“이해찬이 민통련 시절 그러니까 1982~3년쯤이야. 백기완 선생 집에서 윤영규 전국교사협의회 회장하고 같이 있는데 찾아왔어. 그 때 처음 만났지. 이해찬은 그 당시에 잡지사를 할 때였어. 그리고 기독교농민회 활동할 때 자주 만났지. 1988년인가에는 나한테 ‘형님, 국회의원 출마 준비 하세요’ 했는데 난 농민운동한다고 거절했어. 그 뒤에도 국회의원 하라니까 안하고 괜히 고생만 한다고 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어.”

80년대 민주화 투쟁시절 이해찬과 배종렬은 민주화 운동의 동지였다. 그 당시 배종렬이 정치를 시작했다면 고향인 무안에서 국회의원 몇 번은 거뜬히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농민운동에 전념하겠다는 생각으로 이해찬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면서 이해찬과 배종렬이 걷는 길은 달라졌다. 30년이 지난 지금 아스팔트 위에 서 있는 배 전 의장이 여당의 실세 대표가 된 이해찬이 농민들을 외면하는 광경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그가 태어난 사연은 기가 막히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어. 아버지 형제가 세 분 있는데 그 중 한 분이 일찍 돌아가시고 한 분이 일본 오사카에 돈 벌러 가셨다고 해. 일본에서 돈 벌어 할아버지에게 보내드렸는데 그 돈을 우리 아버지가 가져다 도박판에서 하루저녁에 날려 버린 거야. 그 일로 면목이 없으니까 아버지가 제주도로 돈 벌러 가셨어. 공사판을 다녔는데 벌이가 시원찮아 배를 타게 되셨는데 그 배가 나진(함경북도 나진)사람 배였어. 고기를 많이 잡아서 기대를 많이 하셨는데 나진에 가서는 이 사람들이 돈을 안주려고 아버지를 배에 가둬 놓고 육지로 가버렸대. 탈출할 생각 밖에 없었던 아버지가 가만히 밖을 주시해 보니 배가 바람에 움직이면서 옆에 배와 맞닿게 됐고, 이웃 배로 옮겨 가면서 결국 뭍으로 도망 나오게 된 거지. 나진에서 원산까지 걸어가고 원산에서 용산까지 기차를 타고 용산에서 다시 걸어서 무안 집까지 오신거야. 그날이 1932년 9월 초하루 증조할아버지 제삿날인데 제사 지내고 나니 아버지가 들어오셨대. 그러고 내가 태어났지.”

거의 빈털터리가 돼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소작농으로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땅이 좀 있었는데 그마저도 할아버지께서 남의 말에 속아 팔아 버렸다.

“일제 때 주변에서 일본놈들이 땅을 사들이는데 조금 있으면 일본이 망해서 쫓겨 날거다, 그러면 땅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이런 말에 속아서 일본놈한테 땅 다 팔고 소작을 하게 된 거야.”

일본이 망하면 판 땅을 다시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탓이다. 결국 소작농으로 전락해 일제시대 소작농들이 다 그렇듯 고율의 소작료는 물론이고 지주와 일제의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일제 말기에 들어오면서 수탈의 정도는 극심해져 배씨 가족 역시 초근목피로 살아갔다. “농사를 지어 타작을 하면 전부 가져가고 우리 식구는 멍석 아래 깔려있는 것만 긁어모아 먹고 살았어. 어머니가 고생 많이 하셨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다닐 때 밥에 슬가리(씨레기) 넣어서 하고, 쑥 뜯어서 먹고…. 먹는 게 이렇게 부실하니 식구들 모두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였어.”

그는 국민학교 5학년 때 몸이 아파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국민학교 5학년 2학기를 못 다니고 6학년 2학기도 못 다녔어. 나중에 겨울에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했지.” 학교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집안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중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국민재건운동 강사로 활동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이웃마을에 사는 면장이 5·16동지회에 가입하라는 거야, 좋은 거라고. 박정희가 좋은 일 한다고 해서 가입했지. 스무 살 무렵이야.”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농촌을 부흥하게 한다는 이야기에 청년 배종렬은 솔깃했다. 농업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농사에 대한 꿈을 키워가던 시절이었다. “이때 농업기술 책이 많이 나왔는데 그걸 읽으면서 농업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됐지.”

이런 계기로 그는 국민재건운동 강사가 돼 마을마다 교육을 하러 다녔다. “한 면에 3명씩 강사를 선발해 마을을 돌아다니며 강의를 했어. ‘재건운동 해야 산다’ 그러고 다녔지.”

박정희는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국민운동을 전개한다. 국민재건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복지국가를 이룩하기 위하여 전 국민이 민주주의 이념 아래 협동단결하고 자조자립정신으로 향토를 개발하며 새로운 생활체제 확립’을 목표로 제시했다. 청년 배종렬은 유신 쿠데타의 첨병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재건운동을 말단에서 활동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중단했던 학업도 계속했다. “중학교를 안 나왔지만 공부를 좀 해서 바로 고등학교에 들어갔어. 함평농고에 들어갔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서울로 올라가 단국대학교 야간대학에 들어갔지. 그런데 1년을 다니고는 군대 연기가 안돼서 강제로 연행된 거야. 서대문형무소에서 들어갔다가 강제로 군대에 갔어.”

당시 야간대학은 2부 대학이라 하여 정식대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야간대학생들은 재학기간 중 입영연기가 불가했다. 어렵게 학업을 이어가던 그는 강제징집으로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를 마치고는 다시 농사에 전념했다. “우리 논이 다랑이 논이야. 304평짜리 논이 있는데 24개의 다랑이였어. 그걸 내가 혼자 곡괭이로 파서 합쳤어. 사람들 모두 그걸 어떻게 하냐고 했는데 나는 한다고 고집을 부려서 했지.”

그는 중장비가 없던 시절 24개의 다랑이 논을 결국 하나로 만들 정도로 고집도 의지도 강한 사람이었다. 이는 이후 농민운동의 한길을 굳건히 걸어가는 모습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배씨는 이후에 고구마 재배나 앙고라토끼 사육법, 돼지 사육법 등 새로운 농업을 배우기 위해 책을 읽고 교육을 다니며 꿈을 키웠다. 아울러 5·16 이후 만들어지기 시작한 리동농협에도 참여해 상무이사를 맡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뿐만 아니라 고향인 무안군 해제면에 중학교 설립과정에도 참여해 이사, 서무과장, 교사를 겸하는 일을 8년간 담당했다.

그리고는 교회 활동에 열성을 보였다. 쓰러져가는 교회를 재건하고 교회에서 독농가 시범농가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대전기독교회관에서 신용조합교육, 축산교육을 받으러 갔어. 그 때 소를 5마리 키우고 돼지 몇 십 마리 키웠는데 양돈농장으로 키우려고 교육을 받으러 다녔어. 그런데 인천양돈농협에서 충청도 병아리 부화 농장 같이 대규모 농장을 보면서 내가 하는 것은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나 같은 사람이 저 사람들하고 경쟁을 어찌하나 싶었던 거지.” 교육을 다니면서 대농장의 꿈은 사그라졌다.

서경원·정광훈 … 운명적 만남

교육을 다니던 중에 그의 삶을 바꿔 놓는 운명적 만남이 시작된다. “광주 화정동 피정센터에서 교육이 있어서 갔는데 전남대 농과대학장이 교육을 하면서 소 키우면 돈 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소를 키워봤냐? 탁상공론 아니냐고 한마디 했어.”

대학교수의 강연을 공박하고 나선 것이다. 현실 모르는 소리한다고. 이 자리에는 당시 가톨릭농민회 광주교구 총무인 서경원이 있었다. “서경원이 그 자리에 쓸 만한 사람 있나 보러 왔다가 나를 만난거야. 자료를 보내주고 하면서 같이 하자고 하더라고.”

그 해 배씨는 가농 1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하면서 농민운동에 발을 딛게 된다. “대전에 가려고 함평 학다리역에 모였어. 거기에 온 사람들은 개신교 신자들도 많았지. 대전에 도착해서 보니 해남에서도 왔더라고.”

여기서 그는 청년 정광훈을 만난다. 이후 배종렬과 정광훈은 전남 기독교농민회에서 실과 바늘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배종렬 회장, 정광훈 총무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배씨는 1970~80년대 농민운동 뿐 아니라 사회운동의 활동가 양성기관 역할을 한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을 받았다.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을 가서 난생 처음 여자하고 악수도 했어. 나중에 이대총장을 하신 신일영 교수가 거기서 근무했는데 그 분하고. 이우재, 장상환, 황한식, 박진도가 강사로 강의를 했어.”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을 마치고 광주에 내려온 배종렬은 본격적인 조직운동을 하게 됐다. “교육을 마치고 광주에 내려오니까 가농 광주교구 총회가 있었어. 거기서 벌교에 사는 이기환이 나한테 감사를 하라고 무조건 시켰어. 가농 감사를 맡고서는 마을로 돌아와 해제면 유월리 분회를 만들고 본격적인 농민운동을 시작했지.”

그는 가농에서 실시한 쌀 생산비 조사, 농협민주화운동, 을류농지세 폐지 운동, 함평고구마 투쟁을 겪으면서 농민운동 지도자로 성장하게 됐다.

“1978년 3월, 해남에서 전남 기독교농민회를 조직하기 위해 교회에서 교육을 했는데 탄압이 심해서 5일 하기로 한 것을 4일 만에 끝내고 광주로 올라왔지. 월산동 자장면 집 2층에서 전남 기농 창립총회를 개최해서 원래는 회장을 무안 해제 큰 교회 장로님을 시키려고 했는데 탄압이 심하니까 배 장로처럼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연말까지 한시적으로 회장을 맡으라고 해서 회장을 하게 됐어.”

이렇게 맡게 된 전남 기농회장은 4년을 하고 이어서 1982년 기독교농민회 전국본부가 만들어지면서 초대 회장 겸 사무국장을 하게 됐다.

기농 전국회장을 하면서 우리 운동사에선 최초인 미대사관 습격사건을 주도했다. “1985년 쌀 수입개방에 항의하려고 나하고 몇몇이서 미대사관으로 쳐들어갔어. 그런데 경찰에 막혀서 못 들어가고 모두 경찰에 연행 됐지. 다음날 최종진 사무처장하고 몇 명이 미대사관에 항의하러 간 거야. ‘미국대사관 왔다고 경찰 불러 연행하냐’고. 그런데 대사관 문이 열려 있어서 밀고 들어갔어. 최초로 대사관에 들어간 사건이지.”

1980년대 엄중한 시국에 그를 비롯한 농민운동가들의 투쟁은 두려움도 주저함도 없었다. 그는 4년간의 기농 전국회장을 마치고 다시 전농 의장을 맡으면서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전농 의장은 2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품목농협 건설

고향 무안으로 내려온 그는 1993년 무안군양념채소류유통사업영농조합을 만들어 무안에서 생산되는 양파와 마늘 등 양념채소 저장 유통을 통해 농민들의 소득 향상에 주력했다. 무안군양념채소류유통사업영농조합은 1998년 품목농협으로 발전해 오늘의 전남서남부채소농협이 됐다.

배씨는 전남서남부채소농협이 농협중앙회 회원조합으로 가입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위해 조합장직을 내놓았다.

이후 그는 다시 아스팔트로 복귀했다. 농민운동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일에 맞서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배씨는 농민운동과 더불어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지도위원으로 통일운동에도 전념하고 있다.

“농민문제는 분단 극복 없이 해결될 수 없어. 골드만삭스도 통일이 되면 한국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된다고 했어. 분단 극복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야. 이제 나는 늙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힘을 보탤 뿐이지.”

취재를 하면서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배종렬씨는 저온 알레르기 증상이 있다는 것이다. 추운 곳에 오래 있으면 그날은 밤새 가려움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동의 추위에서도 거리의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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