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옛날 영천극장④

  • 입력 2018.12.17 08:34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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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손바닥만 한 한읍(漢邑) 전체를 오롯이 품고 있는 뒷동산 같은 마현산 아래 깍골 동쪽 둔덕위에는 영천극장을 개조한 삼성정미소가 있고, 그 밑으로 아침저녁마다 개숫물이나 졸졸거리는 깍골 개골창을 한걸음에 건너가면 1946년 영천 10월 항쟁 때 서북청년단이 기관총 걸어놓고 본부로 사용했던 영천향교 아래 초가지붕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네가 교촌동이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한읍을 동서로 길게 뚫린, 중앙선이 없는 옛 28번국도가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지나가고 있다. 잡곡 실은 우마차만 들락거리며 은성했던 곳.

1930년대 어느 해의 읍내 전경 사진 한 장이 유일하게 영천성당에 남아 있는데, 전쟁이 끝난 그때까지 이 한읍 풍경은 달라진 것이라곤 없었다. 한없이 낮고 외롭고 쓸쓸하게 이어져 있는 초가지붕들의 곡선을 이따금씩 흔들어버리며 치솟은 여러 채의 더 높고 덜 낮은 기와집과 왜식건물이 돌 던진 연못의 파문처럼 출렁거린다. 풍경의 서쪽 금호강 상류 남천(南川) 절벽 위에 세워져 돌올한 호연정이 거느린 병와유고(甁窩遺稿) 뒤편으로 여기저기 지주들 저택일 것 같은 기와집은 한없이 넓고 크다. 그 중에는 지금 제일교회로 짐작되는 건물도 보인다. 풍경의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원경으로 잡힌 옛 왕조 객사 건물 아래 일제강점기 1920년대와 30년대를 짧고 격렬하게 살다 요절한 작가가 태어났던 창구동 68번지 일대는 사진 안으로 상투만 들이민 형국이다. 조양각과 그에 잇대어 있는 심상소학교 건물이 희미해서 분간이 되지 않는다. 군청과 경찰서를 깡그리 태워버린 10월 항쟁 당시 수천 명이 모여들었던 질청마당 건너 남천 청계석벽(淸溪石壁) 벼랑이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다.

1954년 무렵이었다고 한다. 굽이굽이 구절양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미로 같은 그 교촌동 골목쟁이 어디쯤이었다. 느닷없이 뚝딱뚝딱 건물 세우는 망치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곱슬머리 홍임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홍임수. 그 이름은 조규채 씨와 신국정 씨 두 사람 정도의 머릿속에만 남아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정체를 알고 있지 못했다. 그가 어디 사람이고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 또 어떤 연유로 영천으로 흘러왔다가 어디로 갔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수 박일준이 어린 시절 홀연히 흘러와 신식영천극장 근처 구절양장 골목쟁이를 뛰어다닌 것과 같이 홍임수도 어느 날 갑자기 영천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건물이 완성되자 교촌동 사람들은 비로소 그 건물이 영천극장이란 걸 알게 되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서울에 있는 극장 ‘단성사’를 모방해 같은 시기에 지었다는 신식 영천극장 정면은 당시로선 그 풍채가 웅장해서 우선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래서 ‘극장구경’하려고 구름처럼 몰려오는 사람들로 인해 영천극장 앞 도로는 늘 북적거렸다. 거창하게 생긴 극장이 지어졌다는 입소문을 듣고 몰려왔으나 ‘영화구경’은 안하고 ‘극장구경’만하며 어정거리다 돌아가는 괴상한 사람들 때문에 홍임수는 꽤 오랜 시간 맘고생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제 버릇 어디다 내버릴 줄이나 알았겠는가, 좁쌀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던 얌통머리 없는 건달들과 장사꾼에게 ‘삥’이나 뜯어먹던 주먹패거리들이 네 활개를 치며 신식 영천극장으로 몰려왔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벌교 가서 주먹자랑하지 말라는 말이야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지만, 영천도 예로부터 한주먹 하던 물건들이 많은 곳이었다. 부산 대구 울산 수도권 어디하면 영천에서 길 떠난 한주먹들의 수많은 이야기야 여기서 거론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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