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옛날 영천극장③
[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옛날 영천극장③
  • 이중기 시인
  • 승인 2018.12.0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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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시절이 수상하고 어려울수록 사람들은 극장으로 몰려든다. 아무리 살펴봐야 내남없이 다 어렵고 아픈 사연들을 가슴에 품고 사는데 어디 가서 설움을 하소하랴. 총각들은 가마니 짜서 만든 돈을 조금 헐어서, 처녀들은 홀치기로 번 돈 한 귀퉁이를 쪼개 극장으로 찾아가 울고 웃으며 세파에 찌던 젊은 가슴을 달래곤 하던 시절이었다.

전선이 북상하고도 한참이 지난 늦가을에 가서야 안재욱은 간신히 극장 문을 열 수 있었다.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극장에 의자를 놓을 방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철대가리 없는 군인들이 망가 버린 영사기를 간신히 구하고 나니 주머니에는 먼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아는 사람 집에 가서 외상으로 구한 가마니때기를 날라다 극장 바닥에 깔았다. 애초에는 한 며칠이라도 전쟁통에 시달린 읍민들을 위해 무료상영을 할 계획이었으나 안재욱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내 코가 석 자였다. 손수 함석마이크를 들고 읍내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외쳤다. 읍민 여러분들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영화를 영천극장에서 마침내 상영하게 되었노라고 변사처럼 신파조로 읊조리고 다녔다. 사나흘을 외치고 다닌 덕분이었는지 첫날에는 극장이 미어터지도록 사람들이 몰려왔다. 주먹을 불끈 쥐고 쾌재를 불렀던 안재욱의 얼굴은 그러나 열흘이 못가 참혹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좁쌀권력에 빌붙은 날건달들의 무료입장과 아예 제 의자를 갖다놓고 지정석을 만들어버린 깡패들을 제외하면 돈 내고 들어오는 사람은 열 명도 못 채울 때가 더 많았다. 인민군 9월 공세 전쟁통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던 안재욱 백구두에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찬바람이 불면서 난방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자 날건달들과 깡패들 발아래 안재욱의 구두코는 처참하게 찌그러지고 말았다.

영천소학교 교사로 있던 오빠를 만나러 왔다가 오빠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한 최승희가 예정에도 없던 공연을 했다는 영천극장. 일제강점기 영천 사람들의 서러운 마음을 달래주었던 영천극장은 좁쌀권력에 빌붙은 건달들과 장사꾼에게 ‘삥’이나 뜯는 깡패들 위안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누구는 그때가 전선을 압록강까지 밀어 올렸던 국군이 평양을 버리고 후퇴한다는 흉흉한 소문에 휩싸였던 때였다고 했고, 또 누구는 유엔군이 38선 전역에서 밀려난 시기라고도 했으며, 혹자는 휴전 뒤였다고도 거들어주었지만 언제 어떻게 영천극장이 문을 닫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이 글이 인터넷에서 검색이 된다는 사실을 며칠 전에 알았기 때문에 중요한 일화 하나는 그 분이 생존해 있다는 이유로 생략하지 않을 수 없다.) 조규채 씨도 선친이 어느 시점에 영천극장을 인수해서 정미소로 바꾸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걸 생각하면 파란만장의 세월을 이겨내느라고 어디 경황이 있었겠는가마는 너무 기록할 줄 몰랐던 우리 앞 세대에 대한 원망이 깊을 수밖에 없다.

얼마 전이었다. 이미 써놓았던 영천 인물열전(저잣거리의 장삼이사들)에서 몇 사람에 대한 고증을 위해 조규채 씨를 찾았더니 제주도로 갔다는 소식이었다. 그간 앓던 병이 더욱 심해져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니 나로선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아직 나는 영천이야기박물관인 그에게서 채록해야 할 이야기들이 엄청난데 병세가 호전되어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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