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우리는 ‘슈퍼맨’이 아니다

  • 입력 2018.12.02 13:27
  • 기자명 심문희(전남 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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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희 전남 구례군 마산면
심문희 전남 구례군 마산면

아침이다. 안개가 자욱하니 날이 쉬이 환해지지도 않는다. 정해진 시간에 꼭 출근해야 할 이유가 없고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며 집을 떠났으니 따로 밥 달라고 조르는 이도 없다.

물론 남편에겐 늘 일찍 일어나는 이가, 배고픈 이가 밥을 알아서 먹는 거라 귀에 못이 박히게 이야기를 해놓았던 터라 밥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전쟁 같은 추수가 끝난 후의 달콤한 아침. ‘이불 밖은 진짜로 위험해’를 되뇌며 오랜만에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해와 함께 시작하는 농사일, 이제는 해가 짧아졌으니 ‘룰루랄라’다. 이전의 농부들은 그랬을까? 그 시절 농부들이 부러워진다. 따로 말려두지 않아도 사계절 푸른 채소를 언제든지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우리 비닐하우스 나물들은 아마 혼자서도 잘 크겠지 뭐, 애써 외면하는 아침이다.

어젯밤 꿈속에서 나물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밤새 호미 들고 풀을 뽑았다. 어쩜 꿈에서까지 풀을 뽑고 난리냐 싶다. 어제 내내 풀을 뽑았으니 꿈속에서까지 풀을 뽑은 게 아닐까? 생각만으로 몸이 두 배로 무거워 지는 기분이다.

삼십년 전 가격으로 쌀값이 회복돼 난리란다. ‘밥 한 공기 300원 보장하라.’ 농민들의 요구가 참으로 소박하다. 하지만 소박한 게 아니라 과도한 요구라 생각하는 이들이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다. 추수기에 비축한 쌀을 풀어 가격을 잡겠다 한다. 혹시나 300원이 될까 싶어 안달을 한다.

어찌 아침뉴스에서 쌀값 관련 보도를 한다. 지방 뉴스여서인지 농민들 목소리를 그나마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제발 농민의 목소리를 들어라! 국회 앞에서 농민대표단들의 농성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이불속에서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는 내가 갑자기 민망하고 부끄럽기 그지없다.

밥 먹으라 부른다. 남편이다. 그래 이불 밖으로 출정이다. 오늘도 여성농민으로 하루 시작이다. 배추 300포기를 간해야 한다. 김장 속 재료 사러 장에 가야한다. 다듬고 씻고 썰고 찧고 … 오늘 하루 해야 할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오늘도 녹초가 되겠군’ 시작하기도 전에 생각만으로 녹초가 되는 나, 그래 나도 이제 나이 들었구나, 예전의 내가 아니구나.

불을 지펴 밥을 하는 것도 아니고 냇가에서 얼음 깨가며 빨래를 하지도 않잖아. 남들 다 하는 일들 하면서 호들갑은 혼자 다 떨고 있다며 궁시렁궁시렁. 시어머니가 아니라 친정엄마다. 내가 네 나이 때는 날아다녔다고….

그랬었다. 우리 엄마 세대 때는 그랬다. 자동판매기처럼 말만하면 ‘슈퍼맨’이 되었던 울 엄마들. 집이면 집 농사일이면 농사일 만능이었던 울 엄마들….

그런 엄마 못하겠어요. ‘꽃길만 걷게 해줄게’, ‘손에 물 안 묻게 해줄게’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겨 봐도 농촌에서 농사짓는 엄마가 되는 걸 모두가 꺼려하니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할까?

농촌에서 농사만 지어도 행복한 세상, 여성들과 청년들이 넘쳐나는 세상, 그런 나라를 만들자는 발상의 대전환이나 했으면 좋겠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세상,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매듭을 풀다보면 아마 현실에서도 가능해지겠지 뭐. 너부터 해보라고? 함께 해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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