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농민을 회상하며

이 사람 ㅣ 김영호 전국농민회총연맹 전 의장

  • 입력 2018.11.25 20:53
  • 수정 2018.11.25 20:55
  • 기자명 심증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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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백남기 농민이 경찰 물대포에 쓰러진 지 3년이 지났다.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를 이끌어 냈던 전국농민회총연맹 김영호 의장은 올 1월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김영호 전 의장의 일터인 충남 예산 육인농장 유리온실에선 파프리카가 자라고 있다. 아직 수확하려면 한 달 정도 더 있어야 한다. 유리온실에 들어서니 파프리카는 주먹만 하게 컸지만 아직 초록색이다. 앞으로 한 달 후면 빨간색 노란색 알록달록 색이 물들어 수확이 가능해진다. 김 전 의장은 작은 돋보기를 들고 다니면서 파프리카 잎의 병해충을 꼼꼼히 살핀다.

“그냥 보면 안 보이는데 돋보기로 보면 응애나 진딧물 같은 게 확인돼요. 수시로 살펴야죠. 병충해가 번성하기 전에 적절히 대처하는 게 아주 중요해요. 천적으로 해충을 방제하는데 처음에는 돈도 많이 들어가고 효과도 모르겠더니, 이제는 기술이 쌓여서인지 비용 많이 안들이면서 방제가 잘 되고 있어요.”

김 전 의장은 이곳 충남 예산이 고향이다. 고등학교를 국방부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다녀서 졸업 후 5년 7개월 동안 군대에서 하사관 생활을 하고 중사로 전역했다. “제대하고 진로문제로 고민 참 많이 했어요. 제가 7남매 중 막내거든요. 부모님 연세가 많아서 2~30년 후 모습을 그려보니 농사가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소 100마리 키우는 게 꿈이었죠.”

젊은 시절 누구나 그랬듯이 청년 김영호 역시 진로문제로 3년여를 고민과 방황을 했다. 결국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기로 했다. 농사 결심을 하면서 제일 처음 한 일이 우물 파는 일이었다. “우리 동네가 물이 귀한 동네예요. 물이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까 품을 하나 얻어서 둘이서 일주일동안 우물을 팠어요. 한 10미터 정도 팠을 거야.”

이렇게 청년 김영호는 농사를 시작했다. 논 6마지기 밭 500평이 있던 살림에서 밭에 작은 하우스를 지었다. 그러나 농사를 지어 살아가는 것은 신통치 않았다. “그때는 멋모르고 개념 없이 시작한 거죠. 젊음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인 거예요. 계산도 없이 도전하니까. 그런데 농사를 지으면서 고민을 하게 되고, 이 사회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에 눈을 뜨게 됐어요.”

그때가 전두환 동생 전경환이 소를 수입해서 소값이 폭락하는 일이 벌어지고 농민들이 소몰이 투쟁을 하던 시기였다. 청년 김영호는 친구의 권유로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하게 된다. 1986년, 그 해는 전남 보성에서 백남기 농민이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한 해이기도 하다. 김영호와 백남기는 충남 예산과 전남 보성이라는 750리의 거리와 10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1986년 가톨릭농민회 회원으로 인연이 닿게 됐다. 물론 김영호와 백남기는 서로 알지 못했고 이후에도 특별한 교분이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29년 후 서울대병원에서 만나게 됐다.

지난 1월 임기를 마치고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돌아간 김영호 전국농민회총연맹 전 의장이 여럿이 함께 모여 일군 육인농장 유리온실에서 밝게 웃고 있다. 김 전 의장은 유가족의 굳센 믿음과 오랜 기간 함께 싸워 준 농민들로 인해 백남기 농민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며 이들에게 공을 돌렸다.
지난 1월 임기를 마치고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돌아간 김영호 전국농민회총연맹 전 의장이 여럿이 함께 모여 일군 육인농장 유리온실에서 밝게 웃고 있다. 김 전 의장은 유가족의 굳센 믿음과 오랜 기간 함께 싸워 준 농민들로 인해 백남기 농민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며 이들에게 공을 돌렸다.

새로운 도전

생활은 어려웠다. 결혼도 쉽지 않았다. “부모님을 모시고 있고 게다가 이렇다 할 기반도 없이 농사를 짓고 있으니, 선을 7번 봤는데 모두 퇴짜를 맞았어요. 점수로 치면 낙제점이죠.” 그러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도 열심히 농사를 짓고 가농 활동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농촌생활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농촌에서 버티지 못하면 밀려나야 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돼 있었다. “큰 구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파프리카를 하겠다는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다보니까 이걸 하게 된 거예요.”

1995년 지역의 청년 6명이 새로운 것을 찾아보자고 의기투합해 파프리카 시설농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설농사는 쉽지도 순탄치도 않았다. “기존농사와 달리 규모가 커지니까 옛날 생각으로는 되질 않았어요. 일단 기술이 부족했어요. 하우스에서 토마토 농사한 경험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였어요. 2년간 농사를 실패했죠. 돈도 부족했는데 전에는 1~200만원 정도 부족했지만 시설농사는 억대가 부족하니까 대처능력이 다른 거죠.” 2년간 실패를 딛고 1997년부터는 좀 익숙해져 갔다. 그런데 2000년 하우스에 화재가 발생했다. “그 때 내부 시설이 모두 불에 탔어요. 제일 힘든 때였죠. 2002년까지 굉장히 어려웠어요.”

한편 1986년부터 시작한 농민회 활동은 1995년 파프리카 농장을 시작하면서 적극적으로 활동 할 수 없었다. “농장이 회복되면서부터 다시 농민회 활동을 하게 됐고 2006년 전농 충남도연맹 의장을 맡게 됐어요. 도연맹 의장 두 번, 전농 부의장 두 번, 전농 의장 두 번. 모두 12년간 활동을 하다가 지난 1월에 다시 내려 온 거죠. 그동안 농장에서 같이 하는 분들이 많이 도와주고 배려해 주셔서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고, 고마운 마음이야 다 표현하기도 어려워요.”

임계점에 도달한 민심

“농민의 삶, 노동자의 삶, 각종 사회문제가 들끓고 있지만 돌파구가 없던 상황이었어요.” 이명박정권 5년 박근혜정권 3년을 거치면서 정권의 폭압은 끝을 모르게 치닫고 있었다. “뭔가 치고 나가려고 각자 싸웠지만 2008년 촛불이 명박산성에 좌절되었듯 절망적 상황이었죠.”

민주주의가 퇴행을 거듭할 무렵의 설명이다. 집회결사의 자유는 공권력의 폭압에 제압됐다. 진보정당이 해산되는 초유의 사태가 이어졌다.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을 태운 세월호가 침몰해 300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수장되는 것을 온 국민이 생중계로 보고 있었지만 구조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그 시간 무엇을 했는지 밝히지 못했다. 국정교과서 사태는 박근혜정부가 박정희 독재 시대로 회귀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쌀은 전면 개방됐고 쌀값은 하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갔다. 그러나 이 난국을 헤쳐 나갈 방도를 찾지 못했다.

“저녁이면 숙소에서 조병옥 사무총장, 박형대 정책위원장과 끝없이 토론했어요. 결론은 각자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 같이 힘을 모아 한판 붙어서 정치적 타격을 주는 싸움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민주노총과 농민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지요.”

2015년 초부터 전농은 민주노총과 빈민연합을 만나 진보진영이 함께 싸울 것을 제안했다. “노농빈이 함께 할 것을 결의하고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전농 대의원대회에 와서 ‘민중총궐기’를 제안했고 전농은 대의원대회에서 결의했어요.” 그러나 민주노총은 위원장의 의지가 조직 내에 받아들여지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민주노총은 장기간의 논의 끝에 9월쯤 돼서야 민중총궐기를 결의했다. “민주노총이 결의하면서 10만 명이 넘겠다고 예상했어요.”

이날 대회는 사회의 근본 문제, 민중의 삶의 문제 뿐 아니라 남북문제까지 제기됐다. “민중들의 고통이 임계점에 달했기에 농민들도 참석 안하던 분들까지 많이 오셨어요. 백남기 농민도 마찬가지였죠.” 11월 14일 민중대회는 유례없는 대규모 집회였다. 박근혜정부는 집회 전부터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강경한 대응을 예고했을 뿐 아니라 폭압적으로 대응했다. 경찰은 차벽과 물대포로 민중들의 요구를 억눌렀다. 결국 경찰의 물대포로 백남기 농민이 쓰러졌다.

“백남기 농민이 쓰러지고 1시간 만에 연락을 받고 병원에 달려갔죠. 거기서부터 다시 역사가 시작된 거예요. 철옹성 같은 권력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조병옥 사무총장, 박형대 정책위원장과 병원에서 밤새 토론했어요. 백 농민이 쓰러진 것은 역사의 한순간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싸우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라, 이 싸움은 긴 싸움이고 전선을 크게 갖고 가자, 전농 이름을 굳이 내세우지 말자, 백 농민의 뜻을 잘 받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얘기들을 나눴습니다.”

이렇게 백남기 농민 투쟁은 시작됐고 대학로에 농성장이 꾸려졌다. 지역의 농민들과 농민회 간부들이 일정을 짜서 농성장을 지켰다. “간부들이 농성장에 오면 오전에 지하철 선전전과 모금활동을 하고 마지막에는 서대문 경찰청에서 항의 집회를 하고 돌아왔어요. 시민들 호응이 좋았어요. 모금함에 80만원씩 쌓이니까 농민들이 힘이 났지요.” 농성장에서는 매일 출근시간에 혜화동 로타리에서 마대 옷을 입고 선전전을 하고 지하철 선전활동을 하면서 시민들의 관심을 끌어냈다.

해가 바뀌고 설이 지나면서 전국을 순회하는 도보순례를 시작했다. “들불을 놓으러 다니는 거다, 봄에 들불은 보이지 않지만 순식간에 타 버리듯 바닥의 민심이 끓어오를 것이라고 확신이 생겼어요.” 전남 보성 백남기 농민의 밀밭에서 출발한 16박17일간의 도보순례는 각지의 열기가 모이는 자리가 됐다. 지역의 활동가들이 시간을 내서 도보행진이 끊기지 않도록 모여들었다. 전국 도보순례단은 다시 서울에서 제2차 민중총궐기를 이뤄냈다.

투쟁이 장기화 되고 또한 농번기에 들어서면서 농성장은 한산해졌다. 이때 농성장을 지킨 이들은 가톨릭 신부와 수녀들이었다. “여름이 되니까 농민들이 많이 올 수가 없었고 관심도 많이 떨어졌지만 가톨릭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후 4시가 되면 미사를 드렸어요. 그게 큰 힘이 되었죠.”

백남기를 지켜라

9월 25일 317일간의 사투를 벌이던 백남기 농민은 결국 운명했다. 그러나 싸움은 그날부터 다시 시작됐다. “백 농민이 사망하면 부검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어요. 경찰 침탈에 대비해서 백 농민을 지켜야 했죠. ‘경찰이 침탈한다 모여라’ 하고 문자를 보냈는데 구름같이 사람들이 모였어요.”

백남기 농민이 운명하자 경찰의 시신침탈을 막기 위한 투쟁이 시작됐다. 병원에서 영안실까지 ‘인의 장막’으로 백남기 농민을 지켰다. 경찰은 부검영장을 발부 받아 집행을 시도했다. 병원에서는 농민들과 시민들이 백남기 농민을 지켰다. 농민들의 투쟁은 논밭에서 그리고 서울로 이어지면서 끊이지 않았다. 논을 갈아엎고, 볏 가마를 실은 상경투쟁이 이어졌다. 이제 농민들의 투쟁은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치열한 안팎의 투쟁 끝에 백남기 농민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싸워서 이겨냈어요. 종로경찰서장이 물러가고 최순실 사태가 터지고…, 10월 25일 영장집행기간이 끝나면서 부검 저지를 위한 투쟁을 마칠 수 있었어요.” 부검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에 승리하면서 비로소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11월 5일 백남기 농민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백남기 농민은 역사를 안고 가신 분입니다. 이렇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의 힘이 큽니다. 가족들은 백남기 농민의 뜻이 훼손되지 않도록 끝까지 굳은 모습을 모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족들에게 큰 힘을 얻었습니다. 백남기 농민의 장례식날인 11월 5일 저녁, 광화문에서 대규모 촛불 집회가 열렸어요. 이날 박근혜정권이 무너진 겁니다.”

박근혜정권의 탄핵은 최순실의 국정논단이 발단이 됐지만 근저에는 11월 14일 민중총궐기가 있었다. 각계각층이 개별적으로 대응하던 박근혜정권에 대한 싸움이 하나의 힘으로 모이면서 정권퇴진이라는 단일한 구호로 국민들이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투쟁에 김 전 의장이 앞자리에 있었다.

“나는 그 현장에서 과분한 기운을 받았어요. 제가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죠. 개인을 떠나 당시 전농 간부들이 일치단결해서 차이를 극복하고 싸워나갔기 때문에 대규모 투쟁을 할 수 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크게 배웠어요.” 김 전 의장은 공을 동지들에게 돌리곤 농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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