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김장을 하고

  • 입력 2018.11.25 20:45
  • 기자명 임은주(경기 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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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주(경기 여주)
임은주(경기 여주)

전반적으로 날이 따뜻해졌다고는 하나 예고 없이 훅하고 찾아오는 추위와 된서리 피해를 피하려면 여주는 11월 첫 주나, 둘째 주에 김장을 담습니다. 도시 자식들의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그 때 김장을 하지 못한다면 무는 미리 뽑아두어야 하고 배추는 매일 천막을 씌웠다 벗겼다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지요.

우리 식구 4명만 먹었던 예년 김장과는 다르게 올해는 예년 두세 배의 배추를 절였습니다. 첫날 밭에서 따온 배추를 절이고 양념 준비하고 김치 담을 그릇내고 배추 씻고 속 버무린 후 배추김치 만들고 깍두기 하고 달랑무 김치 담고 나니 셋째 날 새벽까지 이어집니다.

시어머니께서 파 다듬고 찐 마늘을 주셨는데도, 아들과 딸 모두 모여 했는데도 꼬박 45시간이 걸렸습니다.

작년, 우리식구 먹을 것만 담았기에 단출한 김장을 할 때 이웃집 마당에는 이틀 자동차가 10대 정도 세워져있었고 왁자지껄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울렸습니다. 뭔 소리지 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이유가 김장이라는 것을 알고 심난했습니다.

단출해도 김장이 최소 이틀의 시간과 여러 가지의 강도 높은 노동을 거쳐야만 끝나는 일인데 싶고 김장의 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시간과 노동의 강도는 더 늘어나는데 싶었습니다.

김장의 양이 많은 만큼 하는 사람도 많아지겠지만 많아지는 사람들이 밭에서 배추 따고 절이고 마늘, 생강, 파 등의 양념을 준비하는 일부터 같이 하는 것이 결코 아닐테고 늘어난 사람들의 끼니도 결국 한 사람의 몫인데 싶었습니다.

올 여름, 그 이웃집의 아주머니께서 마스크를 하고 바퀴보행기를 밀고 동네를 느리게 느리게 걸어가셨습니다. 왜 그러시냐 묻자 폐암에 걸리셨고 항암치료중이라 하셨습니다.

봄의 못자리부터 가을의 김장까지 당당하고 오지랖 넓고 현명하게 감당해 오신 분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한동안 이 땅의 여성농민들이 다 병들어가는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배추가 자라고 통이 커지면서 올 김장은 또 어떻게 하냐 하는 걱정과 함께 작년까지 300포기를 김장했던 승자언니도 걱정되고 이웃집의 아주머니도 걱정되었습니다. 다행히 승자언니는 다 정리하고 집 식구들 먹을 30포기만 한다고 합니다. 아주 잘되었다고 내 속이 다 시원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집 김장하는 날, 이웃집의 마당에 차가 많이 서 있습니다. 영문을 모르지만 내 코가 석자라 배추 씻고 있는데 아주머니께서 바퀴보행기 밀고 운동을 하시며 김장하냐 말을 거십니다. 아주머니 댁은 토요일은 동생네가 와서 100포기를 담그고 일요일은 자식들이 100포기를 담근다고 하십니다.

처음에는 300포기를 30포기로 확 줄여버린 승자언니네처럼 아주머니 댁도 김장 양을 확 줄여버리면 좋았겠는데 했습니다. 새벽까지 낑낑거리며 김장하고 이집 저집 김치통을 나르다 보니 생각이 바뀝니다.

내가 좀 힘들어도 괜찮다. 이른 봄부터 감자 품고 고추, 깨 키우며 무, 배추 길러준 땅이 있고 여럿이 김장하고 웃고 떠들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는데 그 터에서 식구들 김장담가 든든한 먹거리를 마련하면 내가 좀 힘들어도 괜찮다는 생각이셨을 것 같습니다. 아주머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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