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옛날 영천극장②

  • 입력 2018.11.17 13:05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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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2. 옛날 영천극장

지금 영천등기소 자리에 삼성정미소가 있었던 것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 삼성정미소 건물이 옛날 영천극장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예 없다. 언제, 누가, 영천극장을 세우고 경영했는지에 대한 자료도 증언도 없다. 옛날 신문에서 영천극장을 찾아보니 ‘동아일보 영천지국이 영천극장 앞으로 이전’했다는 동아일보 1934년 6월 1일 광고가 가장 오래된 기사로 확인될 뿐이다. 2013년 무렵에 나는 영천과 영천 것들에 관한 시를 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지만 옛날 영천극장을 기억하는 사람은 조규채 씨가 유일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삼성정미소는 조규채 씨가 신군부에 의해 중앙정보부에서 쫓겨난 이후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조규채 씨 증언에 의하면 한국전쟁 와중의 영천극장 주인은 안재욱이었고 그는 백구두를 즐겨 신는 채약산 아래 도남동 사람이었다고 한다.

알다시피 한국전쟁 당시 영천에서 ‘인민군 9월 공세’는 유명하다.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던 낙동강전투에서 반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영천전투 이후부터였다. 한국전쟁에서 영천전투가 그만큼 중요했다는 것은 미국의 ‘신한국 계획’에서 드러난다. 포항, 안강, 다부동, 창녕, 마산전선에서 인민군이 무섭게 부산을 위협해 올 때, 워커 중장은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영천만 무사하면 ‘신한국 계획’은 폐기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민군 9월 공세로 영천이 함락되기 전 미군은 62만 명 정도로 구성될 한국의 망명정부가 여차하면 남태평양 서사모아제도로 옮겨갈 ‘신한국 계획’을 수립했고 합참이 승인했다.

그런데 영천이 함락되고 말았다. 피난수도 부산의 이승만 정권 실세들 표정들이 어떠했을지 한번 상상해보라. 전쟁 이틀 뒤, 이승만 정권은 6만 명 정도의 망명정부를 야마구치현에 세우기 위해 일본정부에 협조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대전에서 목포까지 내뺐다가 격랑의 뱃길로 간신히 부산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런 부산을 버리지 않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영천은 곧바로 수복된다. 그만큼 영천전투는 치열했다. 영천 상공에서 함박눈처럼 쏟아져 내리던 그 융단폭격을 나는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인민군 하나 보이지 않는 평야 주남벌 위로 포탄을 퍼부으며 날아가는 B29 편대의 위용은 대단한 것이었다. 내가 어릴 적 솔방울이나 관솔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가면 마을 앞산에는 엠원 탄피들만 엄청나게 흩어져 있었고, 북쪽 산에는 굴러다니는 인골과 함께 녹슬어 삭아가는 인민군 탄피들이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그 전쟁 와중에 영천극장은 국군에게 징발 당했다. 한 부대의 고위급들이 영천극장 안에서 작전회의를 하고 숙식을 해결하던 곳으로 사용된 것이었다. 그런데 사흘이 못가 밥 지을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극장 의자들이 하나둘 뜯겨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못가 극장 의자란 의자는 죄다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전선이 북쪽으로 올라간 뒤 영천극장으로 돌아온 백구두 차림의 극장주인 안재욱 표정은 참담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형편이야 어려웠지만 전쟁 중에 고생한 읍민들을 불러 며칠 동안이라도 영화를 무료로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극장 안을 들여다보니 나무 한 토막 천 한 조각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운 흔적과 매캐한 불내가 코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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