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옛날 영천극장①

  • 입력 2018.11.03 13:26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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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1. 영천이야기박물관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1934년 이전에 문을 열었다는 영천극장을 말하기 위해선 먼저 몇 가지 부연설명이 있어야 하겠다. 영화 <저 하늘의 슬픔>을 보며 눈물깨나 흘리고 김추자며 나훈아 리사이틀을 보면서 환호작약했던 많은 사람들도 영천극장하면 1970년대까지만 은성했던 구도심 교촌동 일대를 떠올리지만 어림없는 상상이다. 영천에서 웬만큼 나이를 잡수신 어른들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옛날 영천극장은 사실 북문사거리에 있었다.

나는 1970년대를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는 베이비세대다. 1970년대는 베이비세대가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군대에 갔으며, 박정희가 죽은 전방 휴전선을 지켜본 세대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너무 거창하게 시작되었나? 하지만 영천극장과 조규채 씨를 이야기하자면 그럴 수밖에 없다. 1993년이었던가, 김성칠의『역사 앞에서』가 세상에 나오고 그 책 서문격인「김성칠 선생의 일기에 부쳐」라는 글을 쓴 신경림 시인과, 영남일보에「영천사람 김성칠」이란 칼럼을 쓴 이호철 소설가가 영천에 와서 강연을 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조규채 씨를 만났다.

신경림, 이호철 선생이 강연하러 영천에 오면서 정체불명의 사내 두 명을 대동했는데, 일행이라고만 소개하는 그들은 두 선생과 그림자처럼 붙어서 움직였다. 그러면서 말 한 마디 없었다. 말이 없기는 신경림, 이호철 두 분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내 벌초까지 말끔하게 해놓은, 삼십여 리 산골 김성칠 선생 묘소 참배를 다녀오는 동안 두 사내는 벙어리 노릇이었고, 두 분 선생도 그들과 이따금 대화는 했지만 우리들에게 인사조차 시켜주지 않았다. 행사가 끝나고 나도 잘 모르는 시내 어느 낯선 골목을 더듬어 찾아간 술집 방안에서 웬 사내 하나가 나와 서울 손님들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시장판처럼 왁자하게 인사를 나누고 술판을 벌이는 구석자리에 처박혀야 했던, 새파랗게 젊은 나는 촌닭처럼 눈알만 대룩대룩 굴리며 앉아 있어야 했다.

취기가 오른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정체모를 사내 두 명은 옛 중앙정보부 직원으로 두 선생의 담당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술집에서 그들을 맞은 사내 또한 옛 직장 동료였던 것. 그러니까 두 선생은 과거에 자신의 뒤를 미행하고 찾아와 으름장을 놓기도 하던 옛 중앙정보부 담당들과 교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 두 선생의 강연 소식을 알게 된 그들은 옛 동료를 만나 회포도 풀 겸해서 함께 영천으로 여행을 온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조규채 씨는 신군부에 의해 중앙정보부에서 쫓겨난 뒤, 낙향해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것이 정부미도정공장인 삼성정미소였다. 그 당시 영천에는 아직 농민회가 조직되기 전 ‘농우회’ 시절이었다. 영천농우회는 총회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 가입 안건을 두 번이나 상정했지만 두 번 다 부결되면서 나는 그 조직에서 탈퇴를 한 상태였다. 그때 마침 한 선배가 문학회를 결성하면서 나도 거기에 참여했다. 당시에 나는 등단 절차도 없이 덜컥 첫 시집을 내놓은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조규채 씨는 영천의 야사(野史)와 영천사회를 운영해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참으로 박식해서 ‘잡학사전’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몇 번의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들은 후 나는 그에게 ‘영천이야기박물관’이라는 별호를 붙여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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